한국에서 아기는 태어나면 한 살이다. 새해가 되어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한국식 나이이다. 그렇지만 ‘만 나이’라는 것이 또 별도로 있어서 아기는 0세부터 생후 1년마다 차근차근 나이를 먹는다. 조금 영리한 애들은 생일날에 ‘나는 네 살인데 왜 케이크에는 초가 세 개인가’를 질문하고 또 조금 더 영리한 애들은 ‘1월 1일에 이미 네 살이 되었는데 설날(구정)에 왜 또 한 살 더 먹었다고 하는가’에 의문을 품는다. 아이의 예리한 질문에 애매하게 넘어가려는 어른들 앞에서 한국의 아이들은 일찌감치 생(生)과 시간의 모호함을 깨닫고 조숙해지고 만다.

  법적으로 의미 있는 나이는 대부분 ‘만 나이’이다. 성년연령 19세, 혼인적령 18세, 형사미성년 14세 등은 출생일을 기산일로 하여 각각 정확히 19년, 18년, 14년이 된 날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므로 법령에 ‘만’이 생략되어 표기되어 있을 때도 당연히 만 나이를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식 나이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는 어떻게 표현될까? 부모는 자녀가 ‘6세가 된 날이 속하는 해의 다음 해 3월 1일’에 입학시킬 의무가 있고(초중등교육법 제13조), 청소년이란 ‘만 19세 미만인 사람’을 의미하지만 ‘만 19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을 맞이한 사람’은 제외된다(청소년보호법 제2조). 표현은 복잡하지만 위 조문에서 가리키고 있는 것은 결국 한국식 나이로 여덟 살이 되면 3월에 초등학교에 간다는 것, 그리고 스무 살이 되면 생일이 지났든 안 지났든 함께 호프집에 갈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상식적 내용을 엄밀히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요새 ‘연 나이’라는 개념이 한국식 나이와 별개인 것처럼 인식되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데, 본래 연나이란 법령상 위와 같은 방식들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한국식 나이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장유유서의 전통이 유구한 한국에서 나이는 매우 중요한 신상정보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만나면 통성명도 하기 전에 ‘너 몇 살이야?’ 하고 묻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모두가 한 해에 한 살씩 더 먹고 이것은 그의 능력, 업적과 무관하게 공평하게 주어진 무기가 된다. 그래서 술 취한 사람들이 싸우다 보면 종내 나오고야 마는 고성도 위와 같다. ‘너 몇 살이야?’ 한편 나이는 여자들에게는 다소 민감한 문제로 인식된다. 그래서 한국의 유치원에 가면 키가 껑충한 1월생 여자아이를 간혹 보게 된다. 한 달 한 달이 다른 것이 애들이라지만 얘는 다른 애들보다 좀 많이 건장하네...싶을 때, 엄마가 고백한다. 사실은 12월생인데 (벌금을 내고도) 출생신고를 늦게 했다고. 겨울에 태어나니 딸이 금방 두 살 되는 것이 싫었다는 것이다.

  사실 ‘여자의 나이’와 결부된 묘한 콤플렉스를 심어주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도리스 되리 감독의 영화 ‘파니핑크(Keiner liebt mich,1994)’의 첫 장면도 그렇게 시작된다. ‘서른 살이 된 여자가 남자를 만나는 것은 핵폭탄을 맞을 확률과 같다’고 우울한 독백을 한 주인공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애인을 만들려고 처절하게 노력한다. ‘파니’는 예민한 데다 팔랑귀라서 직장동료의 놀림도, 엄마의 히스테리도, 가짜 점쟁이의 예언도, 그냥 흘려듣지 못한다. 영화가 끝나면 주인공이 불안 속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말, ‘나는 아름답다. 나는 강하다.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다’가 슬픈 주문처럼 오래오래 머릿속에 맴돈다. 25년 전 영화라서 그럴까.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직장도 있고 친구도 있고 집도 있고 엄마하고 사이도 좋은 서른 살 여자가 뭐 저럴 것까지 있나 싶기도한데, 나의 서른 살 맞이는 어땠나 돌아보면 역시 우중충했다. 12월 31일의 스산한 저녁에 혼자 갈치를 구워 놓고 시계를 올려다보던 모습이 사진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겨우 그렇게 20대를 다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또 만 30세 생일에 우울한 덕담들을 잔뜩 들었으니(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그 서른 살을!) 이래저래 한국식 나이는 삶의 쓴맛을 알 려주기에 적당하다.

  이 영화에서 제일 유명하고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파니의 생일 파티가 아닐까. 서른 개 초를 꽂은 생일 케이크를 들고 해골 분장을 한 오르페오가 에디트 피아프를 립싱크하면서 다가오는 장면. 비로소 강박에서 벗어난 파니가 환하게 웃으며 춤추는 장면. 지금도 떠올리면 절로 쿵쿵거리는 반주에 맞춰 가슴이 뛴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가. 남들 눈에 혼자이면 어떤가.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다면 서른 살이건 마흔 살이건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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