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게임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게임을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놀이’가 떠오른다.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한다면 ‘재미’일 것이다. 즉 게임은 재미있는 놀이, 혹은 놀이를 통한 재미의 경험을 의미한다. 그런데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놀이는 ‘형식과 규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항상 어떤 놀이인가를 이해한 다음, 그 규칙을 배우고 플레이에 참여하는 절차를 밟는다. 그러므로 게임은 곧 하나의 규칙과 형식을 갖춘 ‘규칙체계(System of rules)’라 말할 수 있다. 게임이라는 체계는 현실을 모방하면서도 현실과 다른 가상세계를 구축한다. 게임의 규칙 또한 마찬가지로 현실의 규칙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질서를 가지고 있다. ‘게임학’에서는 게임체계를 이야기 중심으로 바라본 ‘내러톨로지(Narratology)’와 규칙중심으로 바라본 ‘루돌로지(Ludology)’로 분류되어 연구되어왔다.

  하지만 이것으로 게임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게임은 플레이어의 참여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플레이어가 놀이에 참여하여 재미라는 경험을 얻는 동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게임은 ‘놀이라는 체계’이면서 또한 동시에 ‘재미라는 경험’이다. 그러므로 게임은 존재론적(Ontological)이면서도 현상학적(Phenomenological)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특히 게임이라는 미디어는 다른 매체에 비해 플레이어의 적극적 수고가 요구된다. 그들은 제약된 게임의 규칙에 전적으로 수긍하면서 재미를 경험하고자 자신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를 조금 거창하게 말한다면 게임에는 참여자의 ‘유희적 태도(Lusory attitude)’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용자의 적극적 탐색과정을 통해 콘텐츠의 맥락을 이해하는 게임의 특성을 에스펜 올셋(Espen J. Aarseth)은 그의 저서 ‘사이버텍스트(Cybertext)’에서 ‘에르고딕(Ergodic)’이라 정의 내렸다. 여기서 에르고딕이란 그리스어에서 ‘작업’을 의미하는 ‘ergon’과 ‘경로’를 의미하는 ‘hodos’를 차용한 물리학 용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게임을 경험하고 싶으면 ‘경로’를 탐색하는 ‘작업’의 수고를 기꺼이 즐겨야 한다는 말이다.  게임을 단순히 놀이로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게임이 에르고딕하기 때문이다. 게임은 플레이어의 적극적 개입과 활동이 요구되며, 여기서 다양한 재미의 경험을 얻는 그 순간에만 그 존재이유가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게임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게임의 규칙체계 + 에르고딕한 게임플레이 = 재미의 경험. 하지만 이것으로 게임의 모든 부분이 설명될까?
 
  우리는 그 무엇이 재미있다고 계속 그 경험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단순한 재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업무관계로 골프모임에 간다고 치자. 만약 여러분이 진정한 고수라면 동반자와 같은 방향으로 볼을 날릴 수 있고, 비슷한 스코어로 경기를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동반자가 긴장된 가운데 느끼는 재미를 위해서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좋은 게임이란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상태에서 플레이할 때 발생하는 긴장된 재미를 경험할 때라 설명한다. 그리고 적절한 긴장은 우리를 게임에 몰입하게 유도한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Flow theory)’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Flow theory)’

  적절한 긴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경쟁에서 상대방을 간신히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어려움을 뜻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적절한 긴장이 필요한 것인가? 그건 아마 타자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게임의 중심에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다. 게임하는 인간은 단순히 유희적인 인간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분노와 희열과 시기와 질투 등 온갖 욕망으로 뒤섞인 인간이 있다. 그래서인지 게임 연구자 에릭 짐머만(Eric Zimmerman)은 게임을 ‘욕망의 구조’라 정의 내렸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