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만드는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도시 시체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만드는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도시 시체스

  대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대도시의 위용(威容)에 가려졌던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적함’을 선물로 주는 작은 도시들은 여행의 또 다른 묘미가 된다. 관광대국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 스페인은 큰 도시건 작은 도시건 간에 언제나 여행하는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수도(首都)만 보고 홀연히 떠나는 나라들도 많지만 스페인은 큰 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진 인근도시들까지 촘촘히 봐야하는 나라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의 테마와 기술이 점점 세분화되는 요즈음엔 소도시만을 전문적으로 여행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생겼다. 소도시 여행 전문책자들이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유럽 대륙을 처음 여행할 때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베를린에서 부다페스트로, 부다페스트에서 밀라노로 종횡무진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했던 ‘무지(無知)스러움’이 아련한 추억이 된 지 오래다.

  바르셀로나에 간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일을 겸해서 떠난 유럽 여행이었지만 바르셀로나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는 예전보다 많이 완성이 되어 있었고 보케리아(Mercat de la Boqueria) 시장 안에서 들리는 언어가 더 많아져서 이색적이었지만, 동양인 여성들을 노리는 소매치기가 더 극성인 것은 나쁜 방향으로의 변화였다. 연일 계속되는 카탈루냐 분리 독립을 위한 시위도 나로서는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예전에 본 것을 다시 보는 것은 좋은 추억을 반추(反芻)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대도시가 뿜어내는 소음은 나를 피곤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도 늙기 시작하나 보다. 

  여행지에서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하는 도시 시체스(Sitges)를 가기로 했다. 운이 좋게도 내가 묵었던 호텔의 건너편에 직행 버스가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이베리안 반도의 풍경을 충분히 감상할 사이도 없이 버스는 인구 2만 7천 명의 작은 해변 도시에 나를 내려놓았다. 바르셀로나에서 남서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시체스는 스페인에서도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도시로 유명하다고 한다. 도시의 성격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몽 샌드위치 가게에서, 맥주 한 잔 마시는 바에서 조차 동양인인 나를 대하는 표정과 태도가 바르셀로나보다 한결 부드럽다. 물론 내 가방을 노리는 소매치기도 이 도시에서는 없어보였다. 이제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지중해가 표현해내는 자유 밖에 없다.

  2월 초인데도 한낮의 기온이 22도까지 올라가자 사람들은 옷을 훌훌 벗고 바다로 뛰어든다. 데리고 나온 개마저 주인을 따라 바닷물로 풍덩. 리조트 건물이 많은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벗어도 너무 벗은’ 완전한 누드비치. 발민스 누드비치는 스페인에서도 널리 알려진 곳인데 특히 동성애자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비치의 모습을 찍는 눈은 당황스럽지만 마음으로는 쌓였던 ‘편견의 틀’을 무너뜨려 버린다. 이건 시체스 사람들의 일상일 뿐이다. 나쁜 것도 외설스러운 것도 아님을 나는 잘 안다. 한편으로는 시체스가 왜 ‘스페인 모더니즘’의 발상지로 불리는지 깨닫게 되었다.

  작은 언덕을 넘어 완전히 리조트가 시작되는 지역으로 걸어 들어가 요트 앞에 있는 작은 바에서 레몬이 듬뿍 들어간 맥주를 시켰다. 이 도시의 냄새가 레몬처럼 상큼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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