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금)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에서 총격 테러가 발생했다. 테러범들에 의해 49명이 숨지고 4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자신을 백인 우월주의자로 밝힌 테러리스트들은 범행 수 시 간 전 자신들의 계획을 담은 온라인 선언문 을 올렸으며, 17분 동안 자신들의 범행을 생중계했다. 테러범들은 선언문에서 “우리의 땅은 결코 그들의 땅이 될 수 없고, 우리의 고국은 우리 자신의 고국임을 보여주기 위해 공격하기로 했다”고 목적을 설명했다. 특정 문화권 출신의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극 단으로 치달은 결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테러와 같은 혐오범죄가 발생할 것인가? 아직은 아니다. 일단 타 문화와의 접촉이 미비하다. 이슬람에 대한 혐오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는 유럽은 시리아 난민 사태로 비정상적인 형태의 문화 교류가 일어난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다양한 문화권과 인종이 살을 부대끼면서 살고 있다. 타 민족, 문화에 대한 혐오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접촉이 있어야 한다. 실질적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는 가상의 집단을 상정하고 혐오를 생산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혐오는 실재의 집단을 만났을 때 깨질 수 있다.

  해외에서 나오는 혐오 발언들이 타 문화권과의 접촉에 따른 두려움과 분노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나라의 그것은 재미를 추구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운지나 한남같은 과격한 발언들은 사용자에게 원초적인 자극을 제공한다. 이 자극은 마약과 같다. 인터넷에서 토론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더 짧은 순간에 얻을 수 있다. 혐오 발언이 주는 자극과 재미는 일단 확실한 재미이긴 한 셈이다.

  우려되는 점은 이런 혐오 발언이 인터넷에서 현실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터넷은 인터넷만의 특수성이 있다. 익명성이 보장되며, 익명 뒤에 숨어서 무슨 짓을 하든 재미만 있다면 그 행동이 용인된다. 어떤 혐오 발언이 그러겠냐마는, 이런 환경 속에서 나온 혐오 발언은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 논리적인 비판이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재미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반박하려는 시도를 진지충으로 몰아가면서 회피할 수 있다. 인터넷의 혐오 발언들은 비판으로부터 사실상 무적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비교적 최근까지 이러한 혐오 발언의 사회 진출 시도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혐오 발언이 원초적인 자극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도 그러한 자극을 좇는 바보는 많지 않다. 그러나 혐오 발언이 현실로 나오려는 시도가 묵인된다면 언젠가 그것은 현실로 나올 것이다. 혐오 발언이 현실로 나올 때, 혐오 범죄는 더 이상 다른 나라의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사용 의도와 사용자의 진영에 관계없이 혐오 발언을 자제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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