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중요한 순간이지만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때가 있는 것처럼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되어도 다시 보기는 두려운 영화가 있다. 나에게는 이 영화가 그랬다.

  영화의 두 주인공인 매기와 그녀의 매니저 프랭키는 호감 가는 성격을 두루 갖추고 있다. 삶의 소신과 전략이 뚜렷하고 자존심과 염치가 있으며 잇속 따지지 않는 애정도 넉넉히 지니고 있다. 웬만해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까지도. 그러나 이런 두 사람이 결국 불행한 종말을 맞게 된다. 선수가 링에서 피 흘릴 때마다 전전긍긍하던 프랭키. 그랬던 그가 병상에서 호흡기에 의존해 여생을 보내야 하는 매기를 보며 고뇌하는 모습은 종교적 신념이나 위법성의 문제를 떠나 삶과 죽음에 대한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결말은 개봉시에도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안락사란 무엇인가? 안락사란 통상 고통이 없도록 환자의 생명을 단축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환자의 극심한 통증과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살인하는 것은 적극적 안락사에 해당한다. 생명을 단축시키는 부작용이 있는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이 간접적 안락사라면, 연명 치료 행위의 중단에 의해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일명 부작위에 의한 안락사로서 존엄사란 일반적으로 이 경우를 뜻한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을 환자들이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하여 살아있는 것이 가능해짐으로써 존엄사 혹은 안락사에 대한 법적 논의가 활발해졌다. 프랑스의 뱅상 욍베르 사건(모친에 의한 안락사)이나 우리나라의 보라매병원 사건(의사의 인공호흡기 제거), 김할머니 사건(병원과 환자 가족의 의견 대립)은 존엄사에 관한 첨예한 논란을 야기했고, 국가별로 상이하지만 법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부터 전면 시행된 소위 ‘존엄사법(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에 의해 비로소 합법적인 연명 의료의 중단이 가능해졌다.

  존엄사법에 의할 때에도 프랭키의 행동은 살인이다. 첫째, 매기는 사망에 임박한 상태에 있는 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치료 가능성 없이 점점 나빠지기만 하며 욕창으로 다리까지 절단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매기는 죽음을 원하지만 그녀의 생명을 끊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둘째, 설령 매기가 사망에 임박한 상태에 있다고 해도 의식이 없다면 연명 장치의 제거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은 환자의 가족이지 프랭키가 아니다. 하지만 프랭키도 매기도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프랭키는 자기 전에 항상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반송되는 편지뿐이다. 매기는 평생 가족에게 헌신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과 무시, 탐욕이다.

  연명 의료의 중단이 허용되는 대상은 매우 제한적이며 엄격한 절차를 요한다. 사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는 의식이 희박한 경우가 많아 그 의사를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직접 작성 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렇지 않으면  환자에게 연명 의료 중단 의사가 있었음을 가족을 통해 확인하거나 그조차 없으면 가족들의 동의 하에 연명 장치를 제거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나 가족 간의 갈등과 심리적 고통을 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하더라도 의문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의향서 작성 후에 죽음에 임박하여 환자의 의사가 바뀌었으나 이를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반면 죽음에 임박하지 않았더라도 고통만이 예정된 생명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한편 매기의 가족처럼 동의권자가 환자의 고통에는 무심하고 경제적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면...? 영화에서 매기의 엄마가 목 아래로 마비된 매기의 입에 펜을 물려 재산 양도를 위한 서명을 받으려고 하는 장면은 가족이 때로 가장 비정하고 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명이라는 존귀한 가치에 대한 불가침성 때문만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간접적으로나마 죽음이 강요될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존엄사에 대한 법적 허용은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