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졸브 노동’ 만연한 드라마 촬영 현장
‘디졸브 노동’ 만연한 드라마 촬영 현장
  • 박현철 기자
  • 승인 2019.04.01 03:13
  • 호수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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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목) 방영된 SBS 드라마 ‘빅이슈’의 방송사고 장면.
지난달 21일(목) 방영된 SBS 드라마 ‘빅이슈’의 방송사고 장면.

  지난달 21일(목) SBS 드라마 ‘빅이슈’에서 컴퓨터 그래픽(이하 CG) 미완성분 장면이 방영돼 논란이 일었다. 일각에선 이번 방송 사고에 대해 방송계에 만연한 ‘디졸브 노동’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디졸브 노동이란 밤샘 촬영 이후 짧은 휴식을 취한 뒤 오전부터 바로 촬영을 재개하는 열악한 노동 환경을 뜻하는 말로, 두 개의 화면을 겹치는 영상 기법인 ‘디졸브’에서 유래했다.

  드라마 ‘빅이슈’에서는 CG 작업이 완료되지 않아 스태프 간 요청 사항이 적힌 메모가 그대로 방영됐다. CG 작업이 프레임을 벗어나 덧씌워져 있고, ‘카메라에 캐논 지워주시고 스틸 잡힐 때 사진 찍히는 효과 넣어주세요’라거나 ‘창 좀 어둡게’ 등의 작업 요청 메모가 그대로 방송에 송출됐다. 이러한 방송 사고는 드라마 ‘빅이슈’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7년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화유기’에서는 CG 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화면이 송출돼 배우가 매달린 와이어가 그대로 방영됐다. 2011년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는 스태프의 무전기 음성이 편집되지 않은 채 방송이 나가기도 했다. 같은 해 방영된 SBS 드라마 ‘싸인’에서는 25분간 방송 음향이 제대로 송출되지 않았다.

  이러한 방송 사고의 원인으로 방송계에서 이뤄지는 디졸브 노동이 지적되고 있다. 국내 드라마의 경우 대부분 매주 방영 분량을 촬영한 후 바로 방영하는 촬영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이러한 촉박한 일정 탓에 스태프들이 하루 최대 20시간에 달하는 노동을 하고 있다. 지난 2017년 고용노동부와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서 현장 스태프 11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드라마 제작 하루 노동시간이 16시간 이상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56%였다. 이 중 22%는 20시간 이상 노동을 한다고 답했다. 이러한 실태에 대해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윤석진 교수는 “근본적으로 드라마 제작이 충분한 제작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진행하는 게 고질적인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방송계 종사자들의 과로사와 자살, 졸음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등의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2012년 KBS 드라마 ‘각시탈’의 보조출연자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2013년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의 스태프 2명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2014년 방영된 JTBC 드라마 ‘달래된, 장국’의 스태프 2명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KBS 대하사극 ‘대왕의 꿈’에서는 장비 트럭을 몰던 스태프가 숨졌고, 분장팀 스태프 7명은 중상을 입었다. 지난 2016년에는 tvN ‘혼술남녀’의 이한빛 PD가 열악한 방송 제작 환경을 견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2월 근로기준법이 개정됐다. 개정안은 기존에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 특례업종에 속했던 영화‧드라마 등의 업종도 주 최대 68시간 근로 규정을 지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방송 스태프의 대다수가 협력업체나 프리랜서(일정한 소속이 없이 자유 계약으로 일하는 사람)로 고용돼 법적 보호를 보장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프리랜서 계약은 근로기준법의 적용 범위에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 산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방송 노동자들은 “촬영 기간 중 하루 16시간 근로를 조금이라도 지키는 곳은 30%뿐”이라며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완벽하게 지키는 곳은 아예 없다”고 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의 ‘드라마제작환경개선TF’는 “계약 형식이 아닌 현장 노동을 중심에 놓고 판단해야 한다”며 “방송 제작 현장을 노동법의 사각지대로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해외 드라마 업계에선 스태프의 근로 시간을 법으로 보호하고 있다. 드라마 산업이 발달한 미국과 영국은 모두 스태프 노동조합이나 연맹을 꾸려 단체협약을 맺고 있다. 영국 ‘방송예능영화공연노동조합(BECTU)’이 지난해 5월 ‘영국독립제작사협회(PACT)’와 맺은 TV드라마 부문 협약내용에는 ‘촬영이 끝나고 다음 촬영까지 최소 11시간 쉬어야 한다’, ‘초과 근무는 시간당 35파운드(약 5만 원) 이상으로 계산된다’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미국의 드라마 스태프 상당수는 ‘극장무대기술자연합(IATSE)’에 소속돼 영화·TV제작자 협회와 협약을 맺으면 개별 스태프들은 170쪽에 달하는 협약에 명시된 근무조건을 기준으로 계약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16년 사망한 이한빛 PD를 기리고 미디어산업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설립된 이후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미디어산업의 열악한 노동 구조를 지적하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고 있다. 이후 △KBS △MBC △SBS 등 직원이 3백 명 이상인 방송사들은 방송 제작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가이드라인에는 주 68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스태프를 직접 고용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늘 이렇게 해왔다는 생각 등 이전의 습관을 버리려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며 “방송 관계자들이 모두 책임감 있게 현장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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