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멋진 하루』에서는 헤어진 연인이 별로 낭만적이지 않은 이유로 재회한다. 1년 전 병운(하정우)에게 이별을 고했던 희수(전도연)가 어느 날 갑자기 병운을 찾아와, 헤어지기 전에 빌려줬던 350만 원을 갚 으라고 하는 바람에 그 하루 동안 병운은 자신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꾸어 희수에게 바로 주는 방식으로 갚아 나간다. 병운은 돈을 ‘빌린다’고 하지만 돈을 주는 그 누구도 그에게서 돈을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 것 같다. 병운의 지인들은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듯, 오히려 희수를 비난하기도 한다(애인이라서, 사랑해서 빌려줬으면 기다려야 한다고 이죽거리다가 격한 말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대책 없이 차용증을 쓰는 것이 너무나 편안한 이 남자는 현실에 있으면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데, 영화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끌리고 있다. 그의 지인들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350만 원에 대한 차용증의 내용을 보건대 희수와 병운은 단순한 호의관계를 넘어 명백히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 있다. 법은 권리를 가진 자를 두둔하므로, 나는 희수의 편이다. 옛 애인을 다그쳐 자신의 채권을 실현하는, 멜로영화에서 흔치 않은 이 주인공은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희수는 그녀의 권리가 소멸하기 전에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명하다.

  채권과 연애-보다 너그럽고 지속적이며 포괄적인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연애’라는 단어를 쓰겠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할 가능성이 커진다. 일정한 사실상태가 오랫동안 지속한 경우에 그 상태를 존중하여 이에 상응한 법률관계를 인정하는 제도를 일반적으로 ‘시효(時效)’라고 부르는데, 그중 소멸시효는 주로 금전채권에서 문제된다. 소멸시효제도는 권리를 가지는 사람이 이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하지 않는 상태가 상당기간 계속된 경우에 그 권리의 소멸을 인정한다(민법 제162조). 그러므로 만약 희수가 이별한 전 애인을 만나기 싫어서 연락조차 못하는 상태로 10년이 지나면 희수의 금전채권은 소멸하게 된다. 본래 민법은 어떠한 권리의무가 당사자들에 의하여 실현되지 않는 상태를 바꾸어 그 권리의무를 실현시키는 것, 즉 사실상태를 법이 시인하는 권리의무상태에 맞게 변경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한다. 이와 반대로 시효제도는 그 권리의무 자체가 사실상태에 맞추어서 변경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래서 채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채무자가, 채권자가 일정 기간 권리행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권리의 소멸을 주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시효제도 자체의 도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시효로 인한 채권의 소멸과 연애의 소멸은 닮은 데가 더 있다. 첫째,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이다. 누가 원인을 제공했건 간에 헤어짐으로 인한 고통은 당사자의 몫이 될 뿐 상대방이나 제3자에게 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법조차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 사실상태를 존중하여 한발 물러섰음을 기억하라. 둘째, 채권과 연애의 소멸에는 소급효(遡及效)가 있다. 소멸시효란 기산일로 소급하여 효력이 생기는 바, 일정한 기간이 경과하도록 행사하지 않은 채권은 정해진 기간의 만료 시점이 아니라 그 한참 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간주된다. 연애 역시 공식적으로 소멸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빛을 잃는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상대방이기에 특별했던 모습, 의미있던 순간이 시들어버리는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퇴색(退色) 앞에서는 찬 사람도 차인 사람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채권과 차이가 있다면, 여기서는 누구도 권리를 주장할 수 없어서, 소멸을 향해 가는 사랑 앞에서 어떤 도움을 구할 길이 없다. 영화『봄날은 간다』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대사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도 그 무력한 심정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파릇파릇한 봄날에 교정을 가득 메운 환한 얼굴의 학생들이 떠오른다. 연애에 관하여 너무 비관적인 글을 쓴 것 같아 후회도 된다. 미리 걱정하지 말자. 채권의 시효는 통상 10년이지만 연애의 시효는 정해진 것이 없다. 희수와 병운의 연애도 사실은 끝나지 않았음을 영화의 결말이 암시하고 있는데, 희수의 적극적인 권리행사가 연애의 소멸시효까지 중단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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