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목) 중국 상하이 만국공묘(萬國公墓)에서 독립운동가 김태연 애국지사의 유해를 꺼내는 파묘 행사가 진행됐다. 이어 29일(금) 화장을 마친 후 임시 안치됐으며, 오는 9일(화)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만국공묘는 상하이 창닝(長寧)구에 위치한 외국인 공동묘지로, 이번 파묘는 김 지사의 유해를 국내 국립묘지로 봉영하기 위해 치러졌다. 이날 행사에 본교 파견단으로 김 지사의 후배인 본교 대외협력실 고승원 실장과 제59대 총학생회 우제원 총학생회장(기독교‧14)이 참석하기도 했다.

  김 지사는 1891년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으며 본교 8회 졸업생(1917년 졸업)이다. 김 지사는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5월 아내와 네 딸을 한국에 남겨두고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몽양 여운형 등과 함께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을 조직해 한인들의 자치 활동을 이끌었으며, 1920년에는 구국모험단 참모부장을 맡아 △군자금 모집 △폭탄 등 무기 구입 △일본 관청 파괴 및 일본 관리 암살 등의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1921년, 상하이에서 거주하는 한인 자녀들의 교육 기관인 인성학교의 교장을 맡아 교육 사업을 벌이다가 병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1995년 김 지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꽃 사이에 놓인 김태연 애국지사의 사진.

  ‘TAI Y KIM’, ‘김태연 지사’가 되다 

  28일(목) 오전 7시 50분께가 되자 만국공묘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찍이 비 예보가 있었으나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바닥에 누워 있는 묘비들 가운데 ‘TAI Y KIM’이라는 영문 이름이 적힌 묘비를 찾아야 했다.

  이날 파묘에는 독립운동가 김태연 지사(1891~1921)의 외손자인 조관길 씨와 고 실장, 우 총학생회장이 참석했다. 이외에도 △상하이 총영사관 최영삼 총영사 △국가보훈처 안준범 주무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하이협의회 이동한 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하이협의회 배제진 수석부회장 △상해한국상회(한국인회) 박상윤 회장 △상해한국상회 원장석 수석부회장이 자리를 지켰다.

  마땅히 사진을 세울 곳이 없어 우선 가방으로 무게를 지탱한 김 지사의 임시정부 시절 사진이 바닥에 누운 묘비 뒤에 놓였다. 안경을 쓰고 양복을 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의 김 지사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꽃 사이에 놓인 김태연 애국지사의 사진.<br>
바닥에 세워진 김태연 애국지사의 사진.

  지난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같은 만국공묘에 묻혀 있던 임시정부 2대 박은식 대통령 등 애국지사들의 유해가 한국으로 봉영됐으나 김 지사의 유해는 뒤늦게 확인됐다. 본래 임시정부 청사에서 멀지 않은 징안쓰루(靜安寺路)에 위치한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가 여러 차례 이장을 거쳐 만국공묘로 옮겨졌고, 묘비에는 별다른 정보 없이 영문 이름만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 지사의 후손 역시 찾지 못해 절차를 진행하지 못했다.

  김 지사의 딸이었던 조 씨의 어머니, 그리고 조 씨는 김 지사가 상하이에 묻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5년 전 조 시를 찾아낸 정부가 조 씨에게 김 지사가 상하이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중국 정부를 꾸준히 설득한 끝에 유해 봉환을 이룰 수 있게 됐다.

  조 씨는 김 지사의 파묘 과정을 지켜보며 “1975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김 지사의 셋째 딸)도 외조부님께서 묻혀 계신 곳이 상하이라고만 아셨지, 어느 곳인지 몰랐는데 5년 전 정부에서 외조부님 무덤을 찾았다고 연락이 와 고국에 모시기로 결정했다”며 “나라를 위해 상하이에서 순국하신 외조부님을 고국으로 모시게 돼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또한 최 총영사는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지사님의 유해를 오늘 드디어 고국으로 모실 수 있게 됐다”며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신 지사님의 마지막 귀국길에 동행해 매우 감개무량하게 생각하고 지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고 밝혔다.

  파묘식 참석자들이 김 지사의 묘지 앞에 두 줄로 섰다. 짧은 묵념과 헌화가 이어졌다. 헌화에 참여한 참석자들은 헌화 전 나름대로 눈을 감고 애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얀 꽃들이 김 지사의 사진 앞에 놓였다. 헌화와 묵념이 마무리되고, 파묘 참석자들이 묘지 밖으로 퇴장하자 만국공묘의 중국인 직원들이 묘지 곁으로 다가섰다. 직원들은 우선 묘비를 드러낸 후 조심스럽게 땅을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김 지사의 유해가 담긴 단지는 1.5m 가량 아래에 있었다. 
 

파묘에 앞서 본교 대외협력실 고승원 실장이 헌화하고 있다.<br>
파묘에 앞서 본교 대외협력실 고승원 실장이 헌화하고 있다.
파묘를 진행하는 직원들.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단지는 한 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묘 현장에서는 날씨 등의 영향으로 흙이 습해져있어 한결 수월하게 파묘가 진행된 것 같다며 다행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조 씨와 안 주무관이 파묘 현장 근처로 가 모습을 드러낸 단지를 확인했고, 마무리 작업을 거친 후 단지는 미리 준비돼 있던 상자에 담겼다. 태극기가 상자를 감쌌다. 김 지사가 사망한 후 98년 만에 마주하는 태극기였다. 조 씨가 김 지사의 사진을 들고 앞장서 단지를 운반했다.

  파묘한 유해를 화장장으로 향하는 차에 실었다. 태극기에 싸인 상자와 김 지사의 사진을 차량 트렁크에 실은 후 참석자들은 다시 한 번 짧은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그 후 트렁크를 닫는 것으로 파묘 과정이 마무리됐다.

우 총학생회장은 “좋은 상태로 유해가 보존돼 있어서 다행”이라며 “애국지사님을 위해서라도 남북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최종 목표인 것 같고, 총학생회 차원에서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고 실장은 “숭실 출신 애국지사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본교가 독립운동 대학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태연 애국지사의 사진을 들고 있는 조관길 씨.<br>
김태연 애국지사의 사진을 들고 있는 조관길 씨.
파묘 확인 서류에 싸인하는 조관길 씨의 손.


  김태연 애국지사, 태극기의 품으로 

  29일(금) 오전 상하이의 한 화장장, 꽃으로 장식된 단상에 김 지사의 사진이 놓였다. 애도의 뜻을 전하는 중국어가 쓰인 현수막이 걸렸고, 붉은 빛에 금박이 박힌 관이 놓였다. 관 역시 색색깔의 꽃에 쌓인 채였다. 이날 화장을 지켜보기 위해서는 △조관길 씨 △고승원 실장 △우제원 총학생회장 △안준범 주무관이 참석했다.
 

김태연 애국지사의 사진과 김 지사의 유해가 들어있는 관이 꽃에 둘러싸여 있다.
김태연 애국지사의 유족 조관길 씨가 김 지사의 유골 위에 꽃다발을 올려두고 있다.

  모든 참석자가 관 앞에서 잠시 묵념하는 시간을 가진 후, 유가족인 조 씨가 관을 열어 유골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단지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유골이 본래의 골격 형태를 찾아 관 안에 누워 있었다. 유골을 확인한 조 씨가 유골 위에 꽃다발을 올렸고, 이후 다시 관 뚜껑이 덮였다. 

  화장장에 소속돼 있는 중국인 직원들이 관 위로 태극기를 덮은 후, 망자를 향해 세 번 인사하는 의식을 치렀다. 직원들이 관을 들어 올리자 김 지사의 사진을 든 조 씨가 앞장서 본격적인 화장 절차를 위해 이동했다. 조촐하고 엄숙한 이동이었다.
 

  다음으로 안내된 곳은 유해를 화장하는 장소였다. 운구 후 잠시 밖에서 대기했다가 유골을 태우는 가마가 있는 장소 안으로 들어서게 됐다. 상주하는 직원이 마스크를 쓰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해를 태우기에 앞서 조 씨와 우 총학생회장, 고 실장이 관 위에 꽃잎을 뿌리는 시간을 가졌다. 꽃잎으로 덮인 관이 화장을 위해 가마 안으로 움직였다. 
 

화장을 위해 운구하고 있다.

   가루가 돼 돌아온 김 지사의 유해는 우선 화장장 내 보관 공간에 임시 안치됐다. 김 지사의 유해는 오는 9일(화) 오후 3시 인천공항으로 귀국해 유해봉환 봉영식을 가질 예정이다. 1919년에 상하이로 망명한 후 100년만에 귀국하게 되는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본교 파견단을 비롯한 이낙연 국무총리 등이 참석할 계획이다. 이어 10일(수)에는 대전 현충원에서 안장식을 거행한 후 안치될 예정이다.
 

화장을 위해 가마로 들어가는 관. 직원이 관을 지켜보고 있다.

  타국에서 움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김 지사의 파묘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향했다. 독립 운동이 전개되던 당시의 기억을 더욱 뜻깊게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사람들의 생활터전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임시정부 청사 근방에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가정집이 즐비해 있었다. 청사 입구 바로 건너편에서도 빨랫줄이나 중국의 보편적인 이동 수단인 자전거, 오토바이를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의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설립됐다. 같은 해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며 수립됐다. 또한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 전까지 상하이에 위치한 청사 외에도 △항저우 △광저우 △충칭 등으로 지역을 옮기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언급을 통해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임시정부 청사 내부에는 당시 김구의 집무실 등이 재현돼 있고, 관련 자료들을 손쉽게 열람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사진도 복원돼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 등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방명록도 걸려 있다. 한편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된 상태로, 임시정부 청사의 외부에서만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윤봉길 의사 전시관에 있는 윤 의사의 흉상.<br>
윤봉길 의사 전시관에 있는 윤 의사의 흉상.

​​​​​​​  루쉰 공원에서 의거를 기억하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임시정부 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현지인들이 산책과 운동을 즐기는 ‘루쉰 공원’이 있다. 루쉰은 ‘광인일기’와 ‘아Q정전’을 집필한 중국의 저명한 작가다. 현재는 루쉰 공원으로 중국 내에서 익히 알려져 있으나, 한국 사람들에게는 1932년 ‘한인애국단’ 소속의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일본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던 홍커우 공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윤 의사는 의거 후 총살형을 받게 돼 순국했다.

  루쉰 공원 내에는 ‘매원’이라는 이름으로 윤 의사 전시관이 있는 공원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매원은 매헌 윤 의사의 공원이라는 의미다. 매원 내에는 윤 의사의 의거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더 안쪽에는 윤 의사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전시관 내에는 윤 의사의 흉상과 관련 자료들을 볼 수 있으며, 2층에는 윤 의사의 의거 관련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윤 의사가 당시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김구와 시계를 바꾸고 의거 현장으로 떠난 일화는 윤 의사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한 가지다. 의거 전날 새로 산 시계를 꺼내고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다”며 새로 산 윤 의사의 시계보다 값싼 김구의 시계와 바꾼 일화다. 이 일화는 윤 의사 전시관 앞에도 설치물을 통해 소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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