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0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체제 아래서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었던 독일연방공화국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독일연방공화국은 소련군이 진주한 동독과 서방연합군이 진주한 서독으로 나뉘어 분할 통치되었다. 그러다가 냉전체제가 굳어지면서 1949년부터는 동서 양쪽에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 분단이 공식화하였다. 1950년대 초에는 한때 중립 통일안이 제기되었으나 무산되고, 국제적 냉전기류에 편승하여 1955년 9월 서독의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ctrine)’에 따라 서독만이 자유선거에 의한 정부를 가진 유일한 독일의 합법국가이므로 서독은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고 하여 대결 국면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대결 국면이 전환기를 맞은 것은 1969년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하여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972년대부터 1987년까지 약 15년간 34차례의 협상을 통해 과학 기술, 문화, 환경 등에 관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동서독 간 민간인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1982년 서독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총리의 동독 방문에 이어 1987년에는 동독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공산당 서기장이 서독을 방문함으로써 통일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다. 독일의 통일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ov)에 의해 추진된 소련의 개방과 개혁정책(Perestroyka)이다. 그 영향으로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눈치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동독도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St. Nikolaikirche) 기도회로 촉발된 평화행사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첫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로타어 데 메지에르(Lothar de Maiziere) 정권이 탄생하는 등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이를 틈 타 서독이 막강한 경제력을 내세워 소련에 경제협력을 약속하고 주변 국가에 외교공세를 펴면서 1990년 초부터 독일 통일의 외부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동서 양당사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이른바 2+4회담이 열려, 8월 말 통일조약이 체결되고, 9월에는 2+4 회담의 승인을 얻어 10월 3일 마침내 민족통일을 이루었다.

  이상의 독일 통일의 지난한 과정이 한국에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북 지도자들의 통일을 위한 만남의 중요성이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통일을 위하여 만났고 앞으로 더 자주 만나야한다. 둘째, 1972년부터 15년간 수십여 회의 협상을 통해 과학 기술, 문화, 환경 등에 관한 협력체계를 구축하여 이루어진 동서독 간 민간인의 활발한 교류의 중요성이다. 우리도 남북한의 민간인 중심의 과학 기술, 문화, 환경 등에 관한 교류를 활성화해야 한다. 셋째,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St. Nikolaikirche) 기도회로 촉발된 평화행사의 중요성이다. 198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St. Nikolaikirche)에서 월요일마다 열렸던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en)는 처음에는 몇 명 오지 않는 조용한 촛불 기도회로 시작되었지만, 독일 통일을 얼마 앞둔 80년대 말에는 매주 십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서 민주주의, 선거와 여행의 자유, 또 독일 통일을 요구하며 거리를 행진하는 거대한 행사가 되었다. 북한도 동독의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St. Nikolaikirche) 기도회와 평화혁명을 기념하는 모임과 같은 행사를 통하여 북한에서 통일의 열기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통일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 없이 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거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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