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제2차 대전 이후 분단을 경험했다는 측면에서 대한민국과 비슷하다.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는 과정과 대한민국과 북한으로 분단되는 과정은 사뭇 다르지만 열강(列强)들의 이해가 중첩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고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민국의 개천절(開天節)이 10월 3일이어서 중요한 국경일이라면, 독일의 10월 3일도 ‘독일 통일의 날(Tag der Deutschen Einheit)’로서 독일인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국경일이라는 것이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붕괴되고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독일은 위대한 통일을 이루어 내었다. 고(故)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가 통일을 선언하는 모습이 전 세계로 방송되었을 때가 생생히 떠오른다. 

  베를린 근처에도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가 있어서 독일의 기차역이나 공항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이라고 명시(明示)해주어 하는 ‘경제도시’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호주의 수도를 시드니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듯이 프랑크푸르트는 한 때 서독의 수도로 오인(誤認)되었다. 많은 국가에서 독일로 비즈니스 출장을 갈 때 가장 많이 방문하는 도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수많은 글로벌 기업의 법인이 있고, 무엇보다 유로화의 발권은행이자 유로존(Eurozone) 국가들의 경제와 통화정책을 총괄하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이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프랑크푸르트는 통일 독일의 경제적 원동력이었음이 분명하다. 동독보다 수십 배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었던 서독은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고, 그 경제적 중심에 프랑크푸르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독일의 기라성 같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마천루가 특히 많이 보이는 이 도시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내가 사는 서울의 역할과 위상을 떠올렸다. 세계 10대 금융 기관 중 9개가 이 도시에 거점을 두고 있다고 하는데, 서울은 통일 한국의 경제적 원동력이 될 수 있을지 자못 강한 의문에 휩싸였다.  

  Frankfurt라는 지명(地名)에서 ‘Frank’는 서양세계사에 많이 등장하는 ‘프랑크족’을 의미하고, ‘Furt’는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는 ‘강의 얕은 부분’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중세시대에는 자유도시로 승격된 바 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대관식을 거행한 도시로도 유명하니 우연히 통일 독일의 경제적 중심지가 된 것이 아닐 것이다. 프랑크족이 강을 쉽게 건너다니면서 다른 민족들과 국제무역을 하는 ‘나만의 상상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며 도심을 거닐었다. 
 

프랑크푸르트의 구시가를 상징하는 뢰머 광장이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구시가를 상징하는 뢰머 광장이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프랑크푸르트가 독일을 넘어 유럽 경제의 중심지라고 해서 삭막한 분위기만을 연출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도시에는 대문호 괴테의 생가가 있다. 괴테는 26세가 될 때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완성시켰다. 나는 그의 생가를 몇 번이나 갔었지만 지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뢰머 광장(Römerberg)을 거닐었던 대문호 괴테가 독일이 분단되고 다시 통일되는 과정을 하늘에서 목도했다면 어떤 시구(詩句)를 우리에게 내릴지. 온갖 상상을 하며 고층빌딩이 만든 스카이라인을 구시가에서 즐겼다. 그리고 통일 한국의 그 때를 스토리텔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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