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컴퓨터 게임이 등장한 이래 끊임없이 대두되어 왔다. 로저 에버트(Roger Ebert)는 다른 예술형식과 비교하여 예술작품 수준의 게임은 없다고 주장한 반면, 아론 스머츠(Aaron Smuts)는 게임이 영화보다 더 종합적인 예술 환경을 구축할뿐더러 사용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등 표현의 영역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예술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게임이 예술의 범주 안에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놀이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Homo Ludens)’적 관점이 깔려있다. 하위징아는 문화가 있어서 놀이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놀이가 있어서 문화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의 근원적 본성은 사유나 노동이 아니라 놀이이며, 따라서 모든 인류 문명은 놀이의 충동에서 나온 것이라 주장한다. 즉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대부분은 호모 루덴스적 충동이 만들어 낸 산물로서, 인간의 풍부한 상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음악, 미술, 무용, 연극, 문학 등 다양한 창조활동이 모두 인간의 ‘유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앞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게임은 놀이다. 모든 놀이는 문화 창조활동이다. 따라서 게임은 곧 예술이다. 여러분은 이 추론에 대해 동의하는가? 개인적으로 이것은 귀납법적 추론이 갖는 전형적인 오류인 듯하다. 이에 나는 이러한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한 조건에 부합하는 게임’으로 약간의 제한을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작품의 본질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은 가다머(Hans-Georg Gadamer)다. 가다머는 우리가 예술작품과 만나는 순간이 하나의 ‘사건 혹은 생기(生起, Geschehen)’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놀이’적 속성과 닮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가다머가 말하는 놀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놀이와는 거리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만났을 때 그것이 평생 잊지 못할 하나의 경험이었다면 우리는 “그건 하나의 사건이 었어”라 말할 것이다. 또한 그 사건 속에서 우리는 전에 알고 있었던 익숙함에서 벗어나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이것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정오에 뜬 태양으로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러나 석양에 혹은 동이 틀 무렵의 태양은 감탄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제야 진정한 태양을 보게 된다. 익숙함에서 벗어난 태양의 본질을 마주하는 것이다.

 ‘생기’,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익숙함에서 본질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단순히 그것을 바라보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내가 그 사건 안에 들어갈 때 극대화되리라. 내가 태양인지 태양이 나인지 구분되지 않는 순간. 마치 장자의 나비의 꿈처럼 그 사건 안에서 나 또한 태양처럼 생기하는 경험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다머의 놀이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무당이 춤을 추며 굿을 하는 것처럼,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은 자신의 의지대로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스스로 발화하여 시인의 입을 빌어 토해 내는 것과 같은 사건을 의미한다. 나는 하이데거가 예술 중의 예술을 시(詩)라 말한 것에 힌트를 얻어 가다머의 놀이적 특성이 반영된 게임을 시(詩)적 게임이라 부른다.
 

게임 ‘Journey’
게임 ‘Journey’

 댓게임컴퍼니(Thatgamecompany)의 ‘저니(Journey)’ 를 보면 특정한 게임의 규칙, UI, 해석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절제된 표현과 웅장한 사운드 속에 주인공이 되어 조력자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의 빛을 좇아 여정을 떠나 노라면 이것은 한 편의 시(詩)이고, 한 편의 예술임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 게임은 미국 뉴욕에 위치한 MOMA(현대미술관)에 예술작품으로 인정되어 전시되고 있으며, 게임 역사상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 후보에 오른 첫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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