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우리가 마주합니다
제주4.3, 우리가 마주합니다
  • 김이슬 기자, 박현철 기자
  • 승인 2019.05.06 02:26
  • 호수 12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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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6일(금)부터 29일(월)까지 59대 총학생회 연대 사업국에서 주관하는 ‘제주 4·3역사 기행’을 다녀왔다. 이번 기행은 4·3 71주년을 맞이해 근 현대사에서 주목 받지 못한 민간인 학살을 재조명함은 물론 제주 4·3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사건 현장을 방문하여 암울했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기회로 삼기 위해 진행됐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DAY1  제주 4·3평화공원, 현의합장묘

  제주 4·3평화공원 기념관

  첫 번째 기행지인 평화공원에서는 제주4·3의 역사부터 현재까지 흐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중에서도 제주4·3의 기폭제가 된 사건은 3·1발포사건이었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시 북국민학교에서 열렸다. 해방이 됐음에도 사회가 좋아지진 않고 계속 살기 어렵자, 과거 항일운동 전통을 계승하며 현재에 닥친 고난을 이기고자 진정한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열망들이 모인 것이다. 제주북국민학교(지금의 제주북초등학교)에 3만 명이 모였다. 관덕정(제주시의 중심가에 자리한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 뒤편에 위치한 제주 북국민학교에서는 오후 2시에 식이 끝나자 곧바로 가두시위가 진행됐다. 문제는 집회가 끝난 뒤 일어났다. 시위대가 관덕정 서쪽으로 빠져나갈 즈음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쳤으나, 이를 그냥 두고 가는 기마대를 보고 화가 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시위대가 빠져나갈 즈음, 기마경찰이 급히 경찰서 쪽으로 달려간 다음 제주경찰서 망루에서 미군정 경찰은 항의하던 군중들을 향해 총을 쐈다. 이로 인해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이때의 발포는 분명히 경찰의 과잉대응이었다. 왜냐하면 항의하는 군중이 아니라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서도 총을 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은 끝까지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이뿐만 아니라 3·1절 집회를 주도했던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제주도민의 거센 항의가 시작됐다.

제주 4·3평화공원 기념관에서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제주 4·3평화공원 기념관에서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DAY2  낙성동 4·3성, 다랑쉬굴

  낙성동 4·3유적지

  현장은 암울했던 과거가 존재했을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제주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들이 토벌군에 의해 초토화 됐다. 이곳 선흘리도 11월 21일 마을이 전소되어 수많은 인명희생과 재산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은 1949년 봄 당국의 재건명령에 의해 길이 약 500m의 사각형 모양의 성을 쌓고서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당시 제주도 전역에 쌓았던 성은 무장대습격 차단이라는 명분과 함께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됐다.

낙선동 4·3성. 성안에는 모서리마다 보초대기소를 지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보초를 섰다.
낙선동 4·3성. 성안에는 모서리마다 보초대기소를 지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보초를 섰다.


  다랑쉬굴

  4·3사건 당시인 1948년 12월 18일, 하도리와 종달리 주민 총 11명이 피신해 살다가 굴이 발각되어 집단 희생당한 곳이다. 이날 군경민 합동 토벌대는 다랑쉬오름 일대를 수색하다가 이 굴을 발견했다. 토벌대는 수류탄 등을 굴속에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했으나, 나가도 죽을 것을 우려한 주민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은 후 굴 입구를 봉쇄했고, 굴 속의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되어 하나 둘 죽어갔다.

  한 때 이들과 같이 다랑쉬굴에 은신해 있었던 채정옥씨는 “사건 발생 다음 날 굴속에 들어가 흩어진 시신들을 나란히 눕혔다. 굴 안에는 그때까지도 연기가 가득차 있었다. 희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었고 코나 귀로 피가 나 있는 시신도 있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DAY3 무등이왓 마을, 진아영 할머니 삶터, 알뜨르비행장 그리고 섯알오름

  동광리(무등이왓)

  조선시대부터 끊임없는 관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해 일어난 농민봉기인 1862년 임술민란(강제검의 난)과 1898년 제주민란(방성칠의 난)의 진원지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1918년 보천교(普天敎) 사건의 중심적인 지역이다.

  동광리에서는 4․3이 발발하기 이전인 1947년 8월 8일 독려차 마을을 방문했던 관리들이 마을 청년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군정 곡물수집정책에 반대하던 마을 청년 3명이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동광리는 미군정이 주목하는 마을이 되어 수시로 경찰이 들락거렸고, 동광마을 청년들은 경찰을 피해 일본, 육지부, 도내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사건으로 마을을 떠난 청년들이 많은 탓인지 4·3사건 당시 동광마을은 2~30대의 젊은이들보다(32.6%) 오히려 장년층(38.6%) 희생이 컸다. 주민들은 “우리 마을의 4․3사건은 바로 ‘보리공출 사건’ 때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명천 할머니’로 알려진 진아영 할머니의 생가에 방문해 추모글을 작성하고 있다.
‘무명천 할머니’로 알려진 진아영 할머니의 생가에 방문해 추모글을 작성하고 있다.

  무명천, 진아영 할머니 삶터

  이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선인장이 많았다. 한립읍 월령리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선인장을 키우는 우리나라 유일의 선인장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무명천 할머니의 지난한 삶이 녹아있는 작은 집이 하나 있다. 무명천 할머니는 1914년생으로, 4·3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9년 1월 35살의 나이에 한경면 판포리의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 뒤 할머니는 무명천으로 턱을 가린 채 말을 할 수도 없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55년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오다 2004년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 1948년 10월 11일, 이승만 정부는 4·3 토벌의 중심 부대로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새로 설치하여 강력한 토벌정책을 실시한다. 게다가 11월 17일에는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돼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국군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로 희생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림 주둔 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와 한림지서 경찰들에 의한 판포리 토벌이 이뤄졌고, 1949년 1월 무명천 할머니는 경찰 토벌대의 총에 턱을 맞고 만 것이다.

  해설사는 할머니는 늘 사람들이 밭에 나가 텅 비어 있는 마을 울담 귀퉁이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아니면 자신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던 4·3의 세월을 탓하며 놀란 눈으로 세상을 응시했다고 설명했다. 잠깐 집을 비울 때도 할머니는 안팎으로 자물쇠를 꽁꽁 잠그고 다녔으며 자물쇠를 얼마나 자꾸 열고 닫았는지 반들반들했다. 4·3 당시의 공포 때문에 할머니는 늘 불안해 떨며 살았다고 한다.

  알뜨르비행장 일제전적지

  일제는 모슬포에 관동군 전초기지의 해군 항공대를 창설했다. 나중에 전황이 서서히 불리해질 즈음 카미카제(神風)기습특공항공대로 연합군에게 자폭기습을 여러 차례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모슬포는 군사도시로서 제주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가 됐다. 모슬포 비행장에 있었던 아카돔보는 일본군의 자랑이었으나, 이들 비행기가 이착륙하도록 비행장을 만들었던 것은 제주도민이었으며 모슬포 비행장 건설에 도내에서 연인원 15만 명 이상이 동원됐다고 알려졌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들이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전투기 격납고를 건설하였다. 알뜨르비행장은 제주도를 일본군의 출격 기지로 건설하려 했음을 잘 보여주는 지상 건축물이다.

  특히 탄약고를 설치하여 해군공격 어뢰정이나 특고비행기의 탄약을 보관하였다가 무장시켜 출격시키곤 하였다.

학생들이 묵념 시간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이 묵념 시간을 가지고 있다.


  섯알오름 

  제주도에서는 가장 큰 학살사건으로 볼 수 있는 ‘백조일손 지지’의 희생자들은 송악산 서편 자락에 위치한 ‘섯알오름의 탄약고터’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섯알오름의 탄약고터는 일제가 항복하면서 탄약고를 폭파시키자 지상의 건물 형체는 사라져버린 채 큰 웅덩이로 변해버렸고 입구에서부터 보면 굴로 보일 수도 있는 곳이다. 이 때 생긴 커다란 구덩이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된 주민을 학살하는 총살장으로 활용됐다. 이 집단묘역은 주민들이 학살된 6년 후인 1956년 5월 18일 유족들에 의해 조성됐다. 이 과정에서 자타의 시신 구별이 어려워 132개의 칠성판 위에 머리뼈 하나를 올려두고 등뼈, 팔뼈, 다리뼈 등 큰 뼈를 대충 맞추고 132구를 구성해 이장했다.

백조일손 영령 희생터에서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백조일손 영령 희생터에서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DAY4  너븐숭이 4·3기념관, 곤을동 마을터

  너븐숭이 4·3기념관

  북촌리는 일제시대에는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 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7년 8월 경찰관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부터 늘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고, 4․3의 와중에는 많은 청년들이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피신하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제주 4·3희생자 원혼 위령비와 각명비이다.
제주 4·3희생자 원혼 위령비와 각명비이다.

  1949년 1월 17일,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 학살 사건이며, 이 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날 한시에 희생됐다. 북촌리는 4․3의 과정을 겪는 동안 330여 호, 1500여 명의 마을 인구 중 500여 명이 토벌대의 보복 학살로 희생됨으로써 리 단위로는 최대의 피해 마을로 기록되고 있다. 희생자들의 제사를 한날한시에 지내는 북촌리에는 너븐숭이 애기무덤 등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흔적들이 많다. 그 일대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일부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른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당시 어린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이 지금의 너븐숭이 소공원이다.

  곤을동 마을터

  4․3의 전 기간을 통틀어 민간인 대학살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것은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배로 간주한다”는 포고문이 발표된 후 부터다. 이 포고령은 곧 소개령으로 이어져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해촌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이후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이른바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삼진작전(三盡作戰)’이 전개된다. 이 기간 중산간마을의 가옥은 95%가 전소되었는데, 약 3만여 채가 불에 태워졌다. 생활 터전을 상실한 주민 2만여 명은 결국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대대적인 도피를 시작한다. 이듬해인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행한 작전으로 토벌작전이 바뀌고, 신임 유재홍 사령관이 “한라산에 피신한 주민들은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방침이 발표될 때까지 근 4개월에 걸친 기간 동안 섬의 곳곳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만행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상이었다.

제주 4.3 당시 초토화돼 터만 남아 있는 곤을동 마을이다.
제주 4.3 당시 초토화돼 터만 남아 있는 곤을동 마을이다.

  그 4개월간은 4․3특별법에서 규정한 4․3의 공식전개기간에 한라산금족령이 개방되면서 7년 7개월의 기간 동안 가장 집중적으로 제주섬 주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 기간이기도 했다.

  곤을동 마을이 불에 타고 주민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한 시기도 이 기간이었다. 4․3 당시 전소된 가옥만 3만여 채에 이르며, 4․3이 종결된 이후에도 복구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만도 100개소에 달한다. 이들 대부분은 중산간마을들이다. 해촌마을이 이처럼 완전히 전소된 경우는 드물다. 예외적으로 전소된 북촌리의 경우도 사건이 종료된 후 다시 주민들이 집터를 고르고 가옥들을 복원해 다시 마을이 이루어졌지만, 이곳 주민들은 밧곤흘 동측의 화북리에 옮겨 살아 곤을동은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다.

  현의합장문 비문 <측면 및 후면>

의귀리에서 학살당한 주민들을 안장한 현의합장묘에서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의귀리에서 학살당한 주민들을 안장한 현의합장묘에서 학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

  아! 여기에 의로운 영혼들이 고이 잠드시도다. 36년간에 걸친 일제통치의 질곡에서 해방된 조국산천, 그러나 사상대립과 좌우충돌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들. 1948년 4월 3일 4 ․3사건은 본도 전역을 휩쓸었고, 이 처참한 와중에서도 일편단심 조상전래의 고장을 지키다 산화하신 아, 갸륵하신 그대 이름들이여!
  의귀리 김윤생, 고경평, 김일석, 양기원, 양기필 이상 음 48년 12월 12일 졸. 김인호, 김재철, 오승윤, 고창숙, 수망리 이춘수, 김영칠, 이춘협, 이춘방, 김애옥 이상 14일 졸
  이제 후손들이 효식 모아 義碑를 세우고 遺德을 기리며 명복을 비옵나니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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