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는 영국 북부 광산지대의 소년이다. 빌리의 집은 똑같은 모양으로 다닥다닥 붙은 비좁은 주택 중 하나이며 아버지와 형은 모두 광부이다. 음악을 좋아하며 늘 뛰어다니는 탄광촌의 11세 소년은 권투 연습장에서 발레 수업을 구경하다 토슈즈를 신게 되고, 결국 왕립발레단의 주연무용수가 된다. 어찌 보면 인간극장에서 소개될 법한 가난한 집 엄마 잃은 소년의 성공기이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 엄마의 패물을 전당포에 맡겨 여비를 구하는 모습, 빌리를 떠나보내는 정거장에서 아버지와 형의 오열... 특히 석탄이 떨어지자 엄마가 치던 피아노를 부수어 땔감으로 쓰는 장면은 옛 한국영화의 최루성에 비견할 만하다. 이렇게 구차하게 그려낼 필요가 있나 싶은 순간도 있지만, 이 영화가 영국 역사상 가장 긴 파업으로 기록된 1980년의 광부 대파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장면의 묘사는 과장된 설정이 아니다. 권투연습장 옆에서 발레 수업을 하는 것은 파업중인 광부들의 무상 급식 장소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며 집안에서 입김이 보일 정도로 추위에 떠는 것은 오랜 파업으로 임금을 받지 못한 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근로자는 누군가에게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에 상대방이 제시한 거래조건이 불리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여 계약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고, 또 근로자는 그 노동력을 자신의 신체·인격과 분리해서 제공할 수 없기에 노동력 제공 과정에서 사용자의 지시와 감독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종속관계에서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확보하기 위해, 근로자가 단결체를 조직하고 쟁의행위를 무기로 단체교섭을 함으로써 사용자와 실질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근로조건을 결정·개선할 수 있도록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보장된다(헌법 제33조 제1항). 그중 단체행동권은 근로자가 주장을 관철할 목적으로 업무를 저해하는 행위, 즉 쟁의행위를 할 권리로서 파업은 대표적인 근로자의 쟁의행위이다(노동조합법 제2조 6호).

  장기간 이어져 온 파업에서 노조의 패색이 짙어지자 형과 아버지는 시종 우울하고 경직된 모습으로 담배를 피운다. 일 년 전 어머니를 잃은 감수성 예민한 아이에 대한 배려나 동정 같은 것은 이 가족에게 없다. 빌리와 형, 아버지의 대화는 단답식의 짤막한 질의, 명령, 그에 상응하는 반항과 비난으로 이루어지며 도대체 소리를 지르지 않고서는 대화를 못 끝낸다(그 때문인지 런던으로 떠나는 버스에서 형이 마지막으로 수줍게 하는 말 “I’ll miss you”를 빌리가 끝끝내 못 알아듣는다). 가족의 갈등은 작업장으로 복귀하는 아버지에게 형이 배신자라고 소리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영화속 광부들의 욕설과 몸싸움이 경찰보다 오히려 동료 광부에게 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파업은 근로자의 ‘단체’행동이라는 점에서 힘을 얻는다.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기본권이 있는데도 근로자에게만 별도로 단체행동권을 인정하는 것, 파업기간 중 사업과 관계없는 자를 채용하거나 대체근로할 수 없도록 금지한 것(노동조합법 제43조)은 모두 근로자가 사용자와 대등한 관계에서 교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료의 사업장복귀는 노조의 교섭력에 치명적으로 불리하며 파업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 영화의 배경인 1981년~1985년을 거치며 영국정부의 강력한 대응과 불리한 여론, 그리고 파업 참가 광부들에 대한 소송 진행 등으로 전국적 탄광 노조의 단합은 무너졌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빌리의 춤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쇠락해 가는 탄광에서 지는 싸움을 힘겹게 벌이고 있는 광부들의 모습으로 꽉 차 있다. 빌리를 배웅하는 형과 아버지의 표정을 보면 향후 빌리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그저 빌리를 이 동네에서 떠나게 한 것만으로 안도하는 듯하다.

  석탄이란 순전히 자연의 산물에 인간의 노동력을 가하여 창출하는 것인데도 그 수익의 분배가 오롯이 자본가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광부의 노동은 더 비극적으로 소모되는 듯 느껴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근육질의 발레리노가 엄청난 높이로 차고 올라가는 장면으로 끝나지만 빌리의 고향에서 노조는 결국 패배하고 형과 아버지는 지하갱도로 내려간다. 그 습하고 어두운 땅 밑의 공간으로 무표정하게 하강하는 광부들. 그들에게 빌리의 도약이 어떤 위로라도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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