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항상 새로움에 목말라한다. 따라서 예술은 기존의 것에 저항한다. 예술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에 새로운 의문을 던짐으로써 그동안 구축해 놓았던 질서와 관습과 체계를 붕괴시키고자 한다. 사진기의 등장은 기존 예술가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표현방식으로 구축하는 한편, 인상주의, 야수파, 큐비즘 등 새로운 예술 사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나는 예술의 진정한 의미가 익숙함에 저항하고 거부하면서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예술의 이러한 특징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더욱이 그들에게 있어서 질서와 무질서의 관계는 단지 예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세계의 본질적인 모습일지 모른다. 질서는 무질서의 단초가 되고 무질서는 다시 질서를 구축하도록 하는 모순된 관계는 마치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뫼비우스의 띠 같다. 그들이 주장하는 수목적 체계와 리좀적 체계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수목적 체계는 하나의 중심에서 파생되어 만들어지는 구조로 뿌리에서 시작되는 나무와 같다. 반면 리좀적 체계에는 중심을 잡을 무언가가 없다. 무질서하며 불규칙하고 항상 가변적인 구조다. 어떻게 보면 수목적 체계와 리좀적 체계는 서로 상반된 대립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겨울과 여름이 대립되는 관계가 아닌 것처럼, 리좀적 체계와 수목적 체계는 서로가 서로의 전제조건이 되는 연결된 관계인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관계를 다음과 같은 기호 체계로 설명하였다. 1번은 왕이다. 2번은 왕 중심에 있는 사제와 관료다. 3번은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질서와 언어의 구조다. 우리는 1번에서 3번에 이르기까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수목적 체계가 완성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번은 새롭게 해석되고 재정되는 언어들이다. 여기서부터 체계의 질서는 조금씩 붕괴된다. 그리고 5번을 보자. 더 이상 왕을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하나의 저항과 탈주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마치 이집트 파라오에게 저항하는 모세처럼. 그리고 6번에 이르면 더 이상 수목적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체계의 중심은 사라지고 리좀적 체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파라오의 체계를 무너뜨린 모세는 자신만의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지 않던가. 즉 리좀적 체계 이후 십계명이라는 질서 아래 새로운 수목적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 관점을 게임으로 돌려보자. 게임은 수목적 체계와 리좀적 체계 중 어느 것에 더 가까울까? 당연히 수목적 체계다. 게임에는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으며 사용자와의 원활한 상호작용을 위해 직관적인 언어와 디자인으로 구성된다. 앤드류 롤링스(Andrew Rollings)와 어니스트 아담스(Ernest Adams)가 게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구조 안에 일관성 있게 연결된 ‘게임의 조화(Harmony)’를 강조하는 것 또한 게임이 수목적 체계임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예술의 가치를 기존의 체계에 저항하는 리좀적 성격에서 발견하고자 한다면, 수목적 체계에 가까운 게임은 예술형식으로 적합하지 않은 매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현재 게임에는 새로운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그중 하나는 게임에 익숙한 게이머가 행하는 자발적 일탈행위다. 그들은 더이상 게임이 요구하는 규칙대로 게임플레이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게임의 가상공간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거나, 다른 게이머와 함께 게임세계관과 상관없는 자신만의 놀이문화를 창조하기도 한다. 또 하나는 게임디자인 스스로 수목적 체계임을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이런 게임들은 일정한 게임규칙을 포기하고 질서를 위배하며 일관성 없는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이머는 이러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비 일관된 게임에 대해 일종의 불편함과 모욕감을 느낀다. 미구엘 시카트(Miguel Sicart)는 이를 ‘모욕적 혹은 불편한(Abusive) 게임 디자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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