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 대학교에서 한국과 중국의 공동주관으로 진행하는 미디어아트 전시에 참석한 기억이 난다. 많은 작품들 중 나는 특이한 작품 하나를 발견했다. 나란히 붙어있는 책상들 위로 여러 깡통들이 놓여있었고 프로젝터는 깡통들 뒤의 흰 벽면에 영상을 투사하고 있었다. 깡통 앞에는 녹색테이프로 고정시켜놓은 버튼 하나가 있었다. 그 작가는 내게 버튼을 눌러보라고 했다.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슈퍼마리오가 등장했다. 나는 슈퍼마리오가 그 깡통 그림자를 넘어갈 수 있도록 버튼을 눌러야했다. 익숙한 점프게임이었다. 그런데 버튼을 또 한 번 누르자 슈퍼마리오가 조금 높게 뛰어올라 화면 밖으로 잠깐 사라지더니 다시 착지했다. 다시 버튼을 누르자 이번에 더 높게 뛰었는지 화면 밖으로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도록 슈퍼마리오는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그 작가에게 고장난거냐고 물었다. 그는 게임이 끝난 거라고 답했다. 뭐라고? 헛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혔지만 잘 보았다고 말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난 불편했고 이 게임은 모욕적이었다.
 

게임 ‘_Dive’

  다른 게임을 보자. 2017년에 소개된 게임 ‘_Dive’는 일인칭 시점의 심리 공포게임이다. 이 게임은 Yes/No를 선택하는 단순한 상호작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플레이할수록 시청각 정보가 왜곡되고 불분명해질 뿐더러 게이머의 의도대로 조작되지 않음으로 인해 일종의 폐쇄공포증까지 유발시킨다. 나는 이 게임을 보면서 문득 앞에서 소개한 작품이 떠올랐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건 불편함이다.

  더글라스 윌슨(D. Wilson)과 미구엘 시카트(M. Sicart)는 이처럼 게임의 전형적인 원리를 거부하는 게임디자인을 모욕적 혹은 불쾌한(Abusive) 게임디자인이라 불렀다. 이러한 게임은 비합리적인 피드백이나 감각적 혼란을 야기해 게이머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게임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는 게이머로 하여금 게임이라는 프레임에 들어가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오히려 현실이라는 프레임으로 되돌아오도록 강요하면서, 동시에 게임에서 경험했던 것들에 대해 도덕적 반성과 자각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쾌한 감정과 도덕적 반성을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철학자라면 칸트일 것이다. 칸트는 예술의 가치를 숭고함에서 찾고자 했는데, 숭고함은 작품의 압도적인 크기와 힘으로 인해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숭고함에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숭고 말고도 ‘섬뜩한 숭고’가 있다. 이 숭고함에서 느끼는 감정은 감성적으로 아름답다는 느낌이 아닌 ‘반성적 쾌’에 해당한다. 반성적 쾌란 감성의 범위를 벗어나 이성과의 관계를 통해 얻는 쾌를 의미한다. 대상이 몰형식적이거나 압도하는 힘을 보일 때, 이것은 감성을 넘어서는 불쾌함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럴 때 인간의 상상력은 대상을 파악하려는 진지함 속에 이성과 관계를 맺게 된다. 작품에서 느끼는 감성적인 불쾌감이 오히려 반성적 판단력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해서만이 반성적 쾌로 전환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결론적으로 숭고함은 미(美)에서 도덕(道德)으로의 이행을 이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달려있을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러 같이 간 일행 중 한 명이 폭포 앞에서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폭포가 좀 크군.” 모욕적으로 디자인된 게임이 우리에게 불쾌함을 야기하고 이 불편함이 오히려 우리의 이성과 연결되어 도덕적 반성을 이끌지는 철저히 우리의 몫이다. 우리에게 이런 도덕적 판단력이 없다면 아무리 우리를 압도하는 그 무엇이 있다 해도 무슨 상관일까. 그저 조금 큰 폭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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