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게이지먼트(Un long dimanche de fiançailles, 2004) - 사라진 약혼자
인게이지먼트(Un long dimanche de fiançailles, 2004) - 사라진 약혼자
  • 이지은 교수 (법학과)
  • 승인 2019.06.03 03:02
  • 호수 1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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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터에서 약혼자가 사라졌다. 전사통지서가 날아왔지만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마띨드)은 약혼자(마넥)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인 솜(Somme)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투라고 불린다. 이 전투에서 양측 사상자가 도합 120만 명을 넘었기에 최전선에서 실종된 마넥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이 사라져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때,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조치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오랫동안 주소지를 떠나 돌아오지 않을 때, 법률관계가 오랫동안 불확정 상태에 머무름으로써 남은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실종선고제도가 있다. 생사가 5년간 분명하지 않은 자는 이해관계인의 청구에 따라 법원에서 실종선고를 한 때에 사망한 것으로 간주된다(민법 제28조). 그리고 전쟁, 선박의 침몰, 항공기의 추락과 같이 사망의 가능성이 높은 위난(危難)의 경우에는 1년간 생사가 불명한 때에도 실종선고를 받을 수 있다(민법 제27조). 그런데 마띨드와 마넥은 아직 약혼 단계에 있기에 마넥이 죽지 않았다고 하여 마띨드가 실종선고를 청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내라면 남편의 생사는 상속개시 여부, 적법한 재혼의 가능성 등과 관련이 있겠지만 마띨드는 약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편 혼인이나 약혼에서는 굳이 법원에서 실종선고를 받을 필요 없이 상대방의 생사불명을 이유로 적법하게 관계를 종료시킬 수 있다(민법 제804조, 제840조). 일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책임이 있는 상대방에 대하여 약혼을 해제한다고 표시함으로써 약혼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약혼 후 범죄를 저질러 형벌의 선고를 받는 경우, 불치병이 있는 경우, 약혼 후 타인과 혼인을 한 경우 등이 그러한 사유에 해당하는데 약혼 후 1년 이상 생사가 불명한 경우도 여기 포함된다(민법 제804조). 요컨대 마넥은 죽었을 가능성이 크고, 설령 죽지 않았다 해도 마띨드는 마넥과의 관계에 구속되지 않고 다른 인연을 찾아 나설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조언이랍시고 마띨드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육안으로 그 죽음을 확인할 수 없다면 실낱같은 바람만으로도 기다림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도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 그 옆에서 현실적인 체념을 강요하는 것은 어쩌면 고통을 극복하는 것에만 관심을 둔 나머지 남의 고통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일 것이다. 영화에서 마띨드의 주변 사람들이 ‘설교하지 않고 함께 있어 주는 동안’ 마띨드는 마넥의 흔적을 따라가고 그 과정에서 마넥과 가까이 있었던 다른 병사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풀려나온다. 거미줄처럼 가늘고 복잡하게 이어진 각각의 사건들은 정교하게 하나의 얼개를 만들어 결국 마띨드를 마넥에게 인도한다.

  이 영화는 참호전에 대한 사실적 묘사 때문에 역사영화나 전쟁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주 거론된다고 한다. 백 년 전의 무기는 살상력에서는 지금의 무기에 훨씬 못 미치지만 근접거리의 인간이 서로를 살해함으로써, 그래서 더 많이 죽인 쪽이 전선을 진전시킨다는 점에서 현장의 참혹함은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영화 속 전쟁은 액션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영웅적 인물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주인공을 비롯한 다섯 명의 병사들은 탈영하려고 손가락을 잘랐다가 그 벌로써 적군과 아군의 참호 사이로 추방된 사람들이기에 불명예스럽고 비참하게 죽어간다. 안전한 막사에서 더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그 병사들은 장기알만큼의 의미도 없는, 무용(無用)하고 괘씸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에게 있어 그들은 포기할 수 없는 하나하나의 온전한 세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주인공의 약혼자뿐 아니라 다른 병사들의 이야기도 성실하게 들려준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여러 인물의 사연들을 소개하면서도 마띨드의 이야기가 길을 잃지 않는 것은 연인 간의 밀어였던 암호 ‘MMM(Manech aime Mathilde)’가 잊을만하면 구석에서 튀어나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짜임새 있는 영화-‘있을 법한’ 작은 이야기들이 촘촘하게 엮여서 불가능한 결말을 ‘있을 법하게’ 완성시키는 영화-가 주는 즐거움. 그 즐거움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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