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못 가진 능력을 가지는 것은 과연 부러워할 일일까. 공부를 잘하거나 노래를 잘하는 정도를 넘어 초인적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최소한 영화 속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히어로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오히려 그 능력 때문에 고통받으니 말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 속 호그와트 학생들의 삶도 고생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은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하는 5인 1실 기숙사에서 위생상태가 의심스러운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 엘리베이터도 없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수업을 듣고, 무시무시한 양의 숙제와 시험에 시달릴 뿐 아니라 교수들의 매서운 감시와 보호(퀴디치 시합 장면을 보면 과연 학생들을 보호할 생각이 있는가 의심스럽지만) 속에 생활해야 한다. 

  게다가 해리 포터의 세계에서 미성년 마법사는 엄격한 통제와 보호의 대상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3편인 ‘아즈카반의 죄수’는 열세 살짜리 마법사가 할 수 있는 행위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해리를 심하게 대하는 아줌마를 풍선으로 만들어버리는 장면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해리는 마법부의 징계가 두려워 도망을 치고 만다. 그토록 가고 싶던 호그스미드 마을에도 보호자의 사인을 못 받아서 학교에 홀로 남겨져야 한다. 해리의 이모 내외는 지적인 면에서도 품성에서도 해리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단지 성년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리에게만 온갖 제한을 두니, 일견 불합리하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머글들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법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의 의미와 결과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의사표시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능력이 행위시에 존재했는가를 일일이 밝히기가 어렵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획일적인 기준을 만들어 법률행위를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정해 두고 있는데, 이것이 행위능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만 19세가 되지 않은 사람, 즉 미성년자는 행위능력이 없기에 법정대리인(부모 또는 후견인)의 동의 없이 유효한 법률행위를 할 수 없다(민법 제5조). 예를 들자면 미성년자는 자기 재산을 갖고 있다 해도 부모의 동의 없이 그것을 처분할 수 없고, 그러한 내용의 계약을 한 경우에는 부모 또는 미성년자 스스로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그린고트은행의 넉넉한 잔고가 있음에도 해리는 고가품인 빗자루를 스스로 구입하지 않고 두 번이나 성인으로부터 선물받는다). 사실 19세 생일이 되었다고 없던 판단능력이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내가 40세 생일이 되었다고 갑자기 불혹의 경지에 이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개 똑똑한 미성년이 자라 똑똑한 성년이 되는 것이며, 공자님 정도 되어야 불혹(不惑)을 거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에 도달할 터이다. 그럼에도 개개인의 능력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행위능력을 제한한 것은 미성년자 개인에 대한 보호뿐 아니라 거래의 안전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거래를 할 때에는 객관적으로 상대방의 능력유무를 알 수 있어야 하기에 연령이나 법원의 심판과 같은 획일적인 기준을 정해 놓는 것이 불가피한 것이다.

  성년이 된 해리 포터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 행복했을까? 이 시리즈를 끝까지 본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해리는 더 깊은 고뇌 속에서 힘든 길을 간다. 영화 속 히어로들은 자신의 능력을 버거워하며 운명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위해서 또는 악에 대항하기 위해서 기꺼이 그러한 고통을 감내한다. 만약 다른 길을 걸으면 악한 또는 비겁자로 그려진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질투인가. 혹은 일상에서 해소할 길 없는 공명심을 주인공에 이입하여 누리기 위함인가. 환상에서나 현실에서나 능력자의 헌신은 경외의 대상이지만, 내가 못 가진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공익을 위해 (나 대신) 희생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능력이란 것은 주식이나 부동산의 동향을 살짝 예측하는 정도, 불안하지 않게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는 정도. 그래서 토실한 아이들과 소풍이며 외식을 즐길 수 있는 딱 그 정도를 가지는 것이 가성비 높은 행복을 누리기에 적당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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