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비명'.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비명'.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생애는 불행으로 점철(點綴)되었다. 더 이상 불행하라고 해도 불행할 수 없는 뭉크의 인생을 살펴보면 누구든지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느낄 것 같다. 뭉크보다 불행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 직감하게 되는 것이다. 뭉크는 한없는 사랑을 받아야할 다섯 살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었다. 그리고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때인 청소년기에 누나마저 병으로 죽게 된다. 뭉크가 성인이 된 후에는 아버지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도 우울증으로 죽기 전까지 치료를 받았으며, 남동생도 서른 살의 나이로 죽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뭉크 역시 평생을 각종 질병으로 고통 받으며 살았다. 그의 인생을 두 단어로 규정하자면 ‘죽음’과 ‘질병’이다. 

  내가 모든 것이 ‘슬로우’할 것 같은 ‘오슬로’에 온 첫 번째 이유는 뭉크 미술관에 있는 뭉크 최고의 작품 <The Scream(비명)>을 보기 위해서였다. 단언컨대, 엄습하는 공포를 이처럼 잘 표현한 그림은 없다. 핏빛 하늘 아래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명의 괴한이 따라오고 다리의 난간 밖에는 짙은 녹색의 늪이 넘실거리며 그림의 주인공을 빨아들일 것 같다. 너무 무서워서 눈동자도 사라진 사람이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른다. 극한의 공포를 목도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은 미친 듯이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다. 그림 안에는 어떤 가능성도 희망도 없다. 뭉크가 지금까지 경험했고 앞으로 경험할 불행의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늘어놓은 것처럼. 

  뭉크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그가 남겨 놓은 ‘공포와 고통의 흔적’이 나에게 들어와 잠시나마 나를 괴롭힐 것 같았다. 무언가 다짐하거나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직전의 심호흡은 긴장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미술관에 들어가는데 심호흡이라니. 내 인생 최초의 미술관 앞 ‘심호흡’이었다. 미술관 앞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나답지 않은 나. ‘오버 한다’는 말은 바로 이 순간이 적격(適格)이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 역시 뭉크의 <비명>앞이었다. 정면으로 보려면 줄을 서야하는 명작 앞에서 뭉클하게 몰려오는 감동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극한의 공포와 절규가 도사리고 있는 그림에는 뭉크의 비참한 인생과 자화상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이 뭉크 자신이라는 것이 아무런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눈에 보였다. 무서운 공포영화가 아니라 ‘서글픈 공포영화’를 한 편 본 것 같은 기분으로 <비명>앞에 오래 서있었다.   

  <Madonna>,<Vampire>,<The Death of Marat>등 뭉크 최고의 명작들을 제대로 감상하느라 미술관에서 반나절이상이나 시간을 보내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도시 오슬로의 시내를 걸었다. 내가 늘 도시의 ‘미학’이라고 생각하는 전차가 있었지만 오슬로의 백야(白夜)는 나의 발에 더 강한 에너지를 심어 주었다. 걷고 또 걸어도 끝나지 않을 ‘하얀 밤’을 천천히 움직이는 오슬로 사람들을 보면서 눈이 피곤해져서 감길 때까지 걸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비겔란 공원(Vigelandsparken)의 수많은 조각상, ‘두 개의 갈색 치즈’라 불리는 오슬로 시청사,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소박함과 검소함을 보여주는 노르웨이 왕궁,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노벨 평화센터(Nobels Fredssenter). 도시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불행한 화가의 인생을 위안해주는 도시 오슬로를 현재의 모습에 낙담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권한다. 불행은 ‘한 때’이고 치유하려는 노력의 위대함은 ‘영원’하다는 것을 오슬로는 천천히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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