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왕가의 품격과 은은한 운하의 정취 델프트
오렌지 왕가의 품격과 은은한 운하의 정취 델프트
  • 정희섭 교수 (글로벌통상학과)
  • 승인 2019.09.30 00:00
  • 호수 1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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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있는 델프트의 운하는 더욱 미학적이다.
자전거가 있는 델프트의 운하는 더욱 미학적이다.

  히딩크 감독으로 친숙한 네덜란드를 우리는 은연중에 ‘오렌지 군단’이라 부른다.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이 언제나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고 나와 환상적인 슛을 날려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네덜란드 사람들이 특별히 오렌지를 많이 먹고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부르는 이름에는 많은 역사적 에피소드가 깃들어 있다. 그런 것들을 하나둘씩 알아나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여행은 물리적인 이동일 수도 있지만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인문학의 저장 공간이기도 하다. 오래 걸어서 발이 아파도 여행을 계속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인문학의 저장 공간에서 수시로 꺼낼 수 있는 ‘지식이라는 이름의 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네덜란드의 ‘국민 색깔’ 오렌지색은 오라녜 낫소(Oranje Nassau) 왕가에서 나왔다. 1568년 스페인과 벌인 독립전쟁에서 빌럼 판 오라녜 공(公)은 전쟁의 선두에 서서 군대를 이끌었다. 국민들은 그의 용맹한 모습에 감동받았고 오라녜 왕가의 오렌지색을 국가의 색깔로 인식했다. 네덜란드 말 ‘Oranje’를 영어로 하면 ‘Orange’가 되는데, 이 오렌지색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특별한 오렌지’로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유럽의 많은 왕가들이 예산 낭비의 원흉이라고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까지 존재하는 네덜란드의 오라녜 왕가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다. 그래서 왕의 날(King’s Day)인 매년 4월 27일에는 온 국민이 오렌지색 옷을 입고 나와 오라녜 왕가의 탄생을 축하한다. 국민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왕과 지도자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지지(支持)를 보내지만 일신의 안전만을 생각하며 먼저 도망친 ‘가짜 왕과 가짜 지도자’에게는 영원한 멸시를 보낸다. 네덜란드 왕가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잘 증명한다. 네덜란드에서 국민들 위에 군림해 온갖 착취만을 일삼았던 구한말(舊韓末)의 위정자들이 더욱 부끄러웠다. 역사는 결국 국민들에 의해 쓰여 진다. 

  대한민국과 네덜란드를 비교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탄 기차가 오렌지 공이 오랫동안 살았던 델프트(Delft)에 도착했다. 존경받는 지도자가 살았던 곳은 남다른 품격을 간직하고 있다. 도시는 누가 건설했고 누가 살았는지도 중요한 관광 포인트가 된다. 이상하리만치 들뜬 기분에 귀국하면 <이都저都> 칼럼의 제목을 어떻게 정할까 생각했는데, ‘위대한 왕가의 품격을 담은 도시 디자인’이라고 하자니 ‘오버’하는 것 같고, ‘오렌지 공의 애국심이 물결치는 도시’라고 하자니 너무 현학적인 것 같아서 우선 도시를 둘러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생각이 너무 앞서가도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 나. 늦어도 문제지만 너무 앞서가도 좋을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칼럼의 제목부터 생각하는 것을 보니 숭대시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델프트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빛낸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의 명화 <델프트 풍경>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운하 위에 드리운 건축물의 그림자와 강변에서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캔버스 안에 절묘하게 구성되어있다. 중요한 것은 얀 베르메르의 그림 속 모습이 현재의 도시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운하 주변에 자전거가 많이 주차되어있다는 것과 나를 포함한 관광객들이 일년내내 방문해서 델프트의 아름다움을 스마트 기기로 촬영한다는 것 정도일 듯싶다. 도자기로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알아주는 도시이다 보니 ‘Made in Delft’라는 문구가 도자기 가게의 창문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마르크트 광장에는 무려 100년에 걸쳐 지어졌다는 신교회(Nieuwe Kerk)가 109미터의 첨탑을 자랑하며 서 있는데, 이 교회의 지하에 오라녜 낫소 왕가의 왕실가족 묘지가 있다. 교회의 지하는 보통 성인(聖人)이나 순교자의 시신을 보존하는 곳으로 사용되는데 이곳에 왕가의 무덤이 있다는 것은 네덜란드 국민들이 오라녜 왕실에 보내는 끝없는 찬사인 것 같다. 나라를 구한 왕가의 품격은 아름다운 델프트의 운하와 함께 오늘도 은은한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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