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올림픽에서 욱일기 논쟁이 한일 간 갈등의 고리가 되고 있다. 욱일기의 연장 선상에 일본의 전후가 있다. 동아시아의 전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냉전’이다. 냉전은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 한반도의 분단, 일본의 55년 체제로 상징된다.

  중국 대륙을 차지하였던 장제스는 공산당을 섬멸시킨 후 온전한 통치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농민을 지지 기반으로 마오쩌둥이 부패와 경제적 혼란을 수습할 수 없었던 국민당을 무너뜨렸다. 이 결과를 미리 예측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장제스도 상대인 마오쩌둥도, 미국과 소련까지. 

  패전국 일본은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 아래 군정통치를 받았다. 미국은 일본 천황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헌법을 고쳐 일본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재벌을 해체하고, 여성 참정권을 부여하였으며,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였다. 그러나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실시된 극동군사재판(보통 ‘도쿄재판’이라함)에서 전범에 대한 처벌이 어그러지면서 일본이 이후 아시아와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국의 운명은 1945년 8월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계기로 급변하였다. 원폭 직후 소련은 동아시아에서 지분을 챙기기 위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하였다. 전쟁이 그대로 끝난다면 무소득이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의 남하에 놀란 미국은 38도선을 경계로 일본군 무장 해제를 제안하였다. 분단의 시작이었고 한반도는 냉전의 첨병이 되었다.

  일본은 한반도 분단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으면 미·소 양군의 무장 해제가 없었을 것이고, 직전 7월 ‘무조건 항복’을 받아 들였으면 소련이 한반도를 내려올 명분이 없었다. 당시 소련은 일본과 교전국이 아니었다. 무장 해제가 필요하였으면 베트남처럼 중국 국민당군이 왔을 것이다. 이미 1945년 2월 전직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는 천황에게 상주문을 올리고 조기에 평화 교섭에 응할 것을 요청하였다.

  유엔의 남북한 총선거를 소련군이 거부하면서 남북에 각각의 정부가 들어섰다. 남북의 집권자는 적화 통일, 북진 통일을 주장하였고, 결국은 6.25 전쟁으로 이어졌고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전후 일본을 다시는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를 만들려던 미국의 정책은 중국 대륙의 공산화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을 반공의 기지로 만들었다. 일본사에 ‘역코스’라 지칭되듯이 이제까지의 민주화 정책은 돌변하고, 정부 요직을 전범들이 차지하였다. 

  A급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가 되었다. 그는 아베 신조 현 총리의 외할아버지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자유민주당(자민당)을 만드는데 기여한 이후 직후 총리가 되었다. 1955년 일본 좌파 세력인 일본 사회당이 통합하자 이에 대응하여 보수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쳐 자민당이 등장하였다. 이후 일본 정치는 집권당인 자민당과 제1 야당인 사회당이 운영하였기 때문에 이를 55년 체제라 한다.

  55년 체제의 일본은 미군 기지를 제공하는 안보 조약을 통해 방위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 건설에 전력 투구하여 급속한 팽창을 이루었다. 55년 체제에 많은 문제가 있었으나 경제 호황이 이를 표면화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버블이 꺼지자 자민당 장기 집권이 무너지면서 55년 체제가 무너졌다. 연립 세력에 정권을 내준 자민당은 극우 세력과 결탁하면서 동아시아에 대하여 역사를 왜곡하는 역사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연장 선상에 아베 정권이 있다. 그들의 목표는 메이지의 소환이라 한다. 그것은 전쟁의 소환이고, 군국주의의 소환이다.

  다시 앞으로가서 욱일기의 사용을 올림픽이라는 측면에서 보자. 근대 올림픽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치열하던 시절 시작한 평화의 축전이다. 일본은 제전의 대행을 맡은 주인이고, 참가국은 손님이다. 대행자가 올림픽의 본질을 훼손할 수 없다. 손님이 기분나빠하는 것을 알면서 굳이 그것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논쟁 이전에 염치의 문제이다. 올림픽을 통해 동아시아가 다시 평화의 손을 맞잡을 수 있도록 일본 시민들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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