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 6일. 히로시마 평화 공원에서는 평화 기념식이 열린다.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아침 출근 시간에 떨어진 이 폭탄에 의해 20여 만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다시 3일 후 나가사키에도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기념식은 이를 상기하며 핵병기의 축출과 항구적인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행사에는 일본의 수상을 비롯하여 요인들이 참가하고 전국에 생중계가 된다. 2016년 5월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위로의 말을 전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또는 도쿄를 비롯한 대공습으로 인한 인명의 희생과 황폐화는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전쟁 말기 일본에서는 식량과 생필품이 전쟁 물자로 반출되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1944년 들어 미군은 대도시를 무차별 폭격하였다. 도쿄를 시작으로 전국의 150개 도시가 폭격을 받았고, 이 공습으로 11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240만 가구 이상의 집이 불에 탔다. 원자 폭탄의 투하로 수십 만의 사람이 죽거나 피해를 보았다. 아이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산간 등지에 단체로 격리 수용되었다. 그곳에서 기아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도 많다. 그 아이들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쟁을 총력전 체제라 한다. 일부의 군대가 아닌 모든 국민도 전쟁에 함께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총력전 체제는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국민들도 합심하여 전쟁에 협력하였다. 전후 일본은 이러한 피해를 근거로 자신들도 피해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피해자들에게 전쟁 책임이 사면되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을 막지 못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태도에 달려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독일도 전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나 그들은 전쟁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성하였다. 물론 독일의 반성은 이를 기반으로 동유럽의 공산화를 막으려던 당시 냉전 상황과 관련이 있긴 하다. 그렇지만 현재도 그들은 나치에 협력하였던 인물을 찾아내 처벌하고, 나치당의 당기였던 하켄크로이츠를 죄악시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합리화 지지는 당연히 처벌 대상이 된다.

  일본의 전쟁에 비판하고 저항한 인물들의 활동도 존재하였다. 1929년 노동당 출신 국회의원 야마모토 센지는 우익 인물에게 암살되었다. 그는 전쟁 반대와 노동자의 삶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였다. 특히 본격적인 전쟁을 개시하기 전 사회주의자와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을 철저히 단속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을 강화하는 것에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중일 전쟁 중 중의원 의원이었던 사이토 다카오도 전쟁 피해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이를 반대하였다. 후세 다츠시는 공권력과 지주.자본가에 피해를 받는 모든 민중을 위해 삶을 바쳤다. 

  이러한 이들의 삶은 가르치고 그들의 삶을 추모하는데 일본 정부가 나서는 것이 자국 내에서 전쟁의 피해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은 것이다. 이와 함께 그러한 전쟁의 피해자였던 식민지와 전쟁터가 된 나라의 사람들에게 이를 적극적으로 반성하는 태도를 지속하여야 한다.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가자. 히로시마 평화 공원에는 위령비와 함께 평화기념 자료관이 있다. 주변의 소학교에도 평화 자료관이 있다. 수년 전 평화 자료관을 둘러보고 나는 관계자에게 ‘이곳 사람들은 진정 평화를 원하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당연하다는 눈빛의 그들에게 그러면 왜 자료관에 히로시마가 왜 원자 폭탄을 맞았는지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는가하고 물었다. 

  평화를 진정 바란다면 전쟁이 일어난 원인들을 찾아내고 그를 교육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다음 일본의 시민들만이 아닌 피해자 모두에게 위로와 애도를 하여야 할 것이다. 아베의 일본이 진정 평화를 바라고 세계의 일등 국가로 자리매김하려면 한 두 번의 립서비스가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반성이 앞서야한다. 바이제츠커 前 독일대통령은 일본에 대하여 한 마디로 말하였다. “과거에 눈 감은 자는 미래를 볼 수 없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