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 남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유능하고 합리적인 초등학교 교사(조제프)는 가족을 데리고 학교 관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어느 여름 조제프의 아들 마르셀은 이모의 가족과 함께 별장에서 방학을 보내는데, 위대하다고 믿어온 아버지가 부유한 이모부 곁에서 초라해지는 모습을 자꾸 보게 되어 불만이다. 사냥에서도 이모부에게 질까 봐 염려한 마르셀이 사냥터에 몰래 따라갔다가 아버지가 쏘아 떨어뜨린 대왕자고새를 번쩍 들어 올리는 장면이 영화의 원래 제목을 설명해준다(내 아버지의 영광: La gloire de mon père).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엄마가 장을 보러 갈 때마다 교실에 맡겨졌던 마르셀이 아무도 몰래 글을 깨쳤음을 수업 중에 알게 되자 아빠는 기뻐하고, 엄마는 ‘머리가 터질까 봐’ 걱정해서 책을 못 읽게 치워버린다. 부모의 교육관이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아빠의 지도와 엄마의 보살핌 속에 아이는 잘 자라났다.

  요새도 글을 일찍 깨치는 아이들은 제법 있지만 스스로 깨칠 때까지 무심히 기다려주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글을 깨친 아이를 걱정해서 독서를 막는 엄마는 아마 없을 것이다. 개인의 능력으로 사회적 지위와 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난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자녀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자 사명이 되었다. 그러한 믿음이 약해진다 해도 물려줄 부(富)가 없는 부모는 더더욱 교육의 끈을 놓기 어렵다. 그나마 안정적으로 장래의 수입을 보장받으려면 좋은 학벌과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의 여유라도 있다면 다 같이 그 한정된 자리를 향해 달려간다. 여기서 비롯되는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처는 다양했다. 순차적으로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고교평준화를 실시했으며 1980년에는 과외를 전면금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000년 4월, 헌법재판소는 「학원의설립·운영에관한법률」의 과외금지규정을 위헌으로 판단하면서 자녀교육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자녀의 양육과 교육은 일차적으로 부모의 천부적인 권리인 동시에 부모에게 부과된 의무이기도 하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권’은……모든 인간이 누리는 불가침의 인권으로서……자신의 인생관·사회관·교육관에 따라 자녀의 교육을 자유롭게 형성할 권리를 가지며, 부모의 교육권은 다른 교육의 주체와의 관계에서 원칙적인 우위를 가진다”(2000. 4. 27. 98헌가16, 98헌마429(병합) 전원재판부). 

  보통 사교육의 문제를 논할 때 부모의 노력은 ‘과열’되었다고 도매금으로 비판받는다(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예서 엄마나 차교수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런데 실은 모든 부모에게 불가침의 인권인 자녀교육권이 있으며 이 권리는 감히 제3자가 간섭할 수 없는 원칙적인 우위를 가졌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처럼 헌법재판소가 공인한 숭고한 권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갈등을 멈추기 어렵다. 부모가 교육관을 정립하는 것은 중학교 2학년생이 인생관을 정립하는 것 못지않게 힘들기 때문이다. 교육관을 정립했다 해도 독립된 한 인격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그를 훈육하고 지도함에 있어 이 방향이 옳은 것인지, 기대한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 그 기대가 순수한 것인지 계속해서 의심하게 된다. 부모와 자식 쌍방을 속박하고 마는 이 치열한 노력이 과연 자식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부모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부모가 되고 보니 나의 대왕자고새를 잡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몇 가지 성격, 이를테면 경쟁심이나 과제집착력, 인정욕구 같은 것이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기준에서 더 나은 모습을 바라고, 태평한 아이에게 극기(克己)를 요구하다가, 후회와 반성을 되풀이하며, 언젠가는 이런 나를 이해하겠지 하는 죄책감 섞인 희망으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마르셀의 아버지가 부럽다. 아버지의 전능함을 믿었을 만큼 어린 자녀에게 신뢰를 주었고, 시간이 흘러 그 자녀가 실망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도 연민과 사랑 속에서 아버지를 이해했으니 말이다. 자고새를 양손에 들고 웃는 아들 마르셀이야말로 진정한 ‘아버지의 영광’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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