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의 권력은 기껏해야 먹이를 가장 많이 차지하거나 짝짓기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수준으로 끝난다.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동물의 우두머리는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면 다시 싸워야하고 싸움에서 지게 되면 아무 불평 없이 서식지의 변방으로 퇴장한다. 지극히 명료(明瞭)한 권력구조가 아닐 수 없다. 우두머리가 되려면 싸움에서 이기면 된다. 싸움에서 진다고해서 잔인하게 보복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지도 않는다. 싸우다 깊은 상처를 입고 죽을지언정 싸움이 끝나고 나서는 생명을 유지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우두머리보다 조금 늦게 덜 먹으면 된다. 그러나 인간의 권력은 어떠한가. 패자(敗者)의 일족을 모두 죽임은 물론이거니와, 권력의 무한함을 과시하기 위해 사후(死後)의 세계까지도 걱정하며 준비한다. 영원히 살면서 권력을 향유하려고 하는 것은 기본이고, 죽어서도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지만 인간에게 내재한 사악성은 인간의 권력을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 왔다. 
 

무한권력의 정점에 있는 진시황의 병마용
무한권력의 정점에 있는 진시황의 병마용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무려 70만 명을 동원하여 아방궁을 건설했고, 북방민족의 침입을 두려워한 나머지 만리장성을 축조했다. 한편으로는 전 세계로 사람들을 파견하여 불로초(不老草)를 찾게 했다. 그러나 인간 진시황의 무한권력은 병마용(兵馬俑)에서 정점을 찍는다. 통일왕국 진나라가 군사력의 쇠퇴로 몰락하는 것을 두려워한 그는 순사(殉死)대신에 병사를 닮은 인형을 흙으로 빚어 자신의 무덤에 묻게 했다. 한 개의 무게가 300킬로그램에 달하는 인형 8천 개가 매장 되었는데 아직도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사후세계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후궁들과 신하들도 함께 생매장 당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끝이 없어보였던 진시황의 권력은 그가 50세의 나이에 객사(客死)하면서 허무하게 끝났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병마용을 보기 위해 내가 3천년 역사의 고도 시안(西安)에 왔다는 것이다. 

  시안은 진(秦), 한(漢), 수(隋), 당(唐) 왕조의 수도로 옛 이름은 장안(長安)이었다. 장안이라는 말은 한 나라의 ‘수도(首都)’를 뜻하는데, 우리가 ‘장안의 화제다’라는 표현을 쓸 때의 장안과 같다. 특히 당나라는 국적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했는데 이런 개방정책 때문에 문화가 융성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고 한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유명한 신라의 최치원이 6두품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필가로 이름은 날린 곳도 시안이었다고 생각하니 시안이야말로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글로벌 시티’였다는 생각이 꿈틀대었다. 글로벌 시티의 조건은 하드웨어적인 편의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성향이 얼마나 ‘Open’ 되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신라로 돌아와 신분제의 한계를 절감하고 암울한 시기를 보냈던 최치원의 한이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치유되었는지를 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오래된 도시 ‘고도’에서 현대 못지않은 ‘Globality’를 느끼는 나. 주말에는 곳곳에서 수십 명이 모여 광장무(廣場舞)를 추는 도시 시안에서 인간의 권력을 넘어 대륙의 광활함과 쾌활함을 함께 음미했다. 

  시안이 있는 산시성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모아놓은 산시역사박물관,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청비(城壁), 현장법사가 645년 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번역하고 보관했다는 따옌타(大雁塔), 시안의 밤을 현란한 색깔로 밝히는 중러우(鐘樓) 등 볼 곳이 너무 많아서 시간을 아껴가며 돌아다녔다. 저녁 시간에는 당나라 시대의 가무를 즐길 수 있는 탕러궁(唐樂宮)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한중일은 비슷하다고 하는데 왜 지난 몇 년간은 중국과 일본을 갈 때마다 한국과 다른 점만 보이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한국이 점점 작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내가 바라는 한국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면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교류해왔던 이웃나라들이 더 크게만 보여서 그런 것은 아닐는지. 어리석은 인간이 만든 권력조차 한국에서는 더 초라하게 느껴지는 11월의 첫째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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