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의 소중함을 아름답게 역설했다. 단순히 쾌락을 위해 또는 이익을 얻기 위해 사귀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고 했다. 서로의 좋은 삶을 위해 돕고 격려하는 친구여야 참된 친구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친구는 많이 사귈 수가 없다고 했다. 그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라야 진짜 친구라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아리스토텔레스도 친구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고 했다.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그것을 위해 때로 친구를 버리는 아픔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스승 플라톤을 매몰차게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8살 나이에 플라톤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동안 줄곧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수제자로서 선생의 모든 지식을 남김없이 빨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을 정면 비판했다. 플라톤 철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이데아론을 터무니없고 허황된 것이라고 내쳐버렸다. 플라톤 이상국가론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공산주의 이론을 “인간의 천성에 어긋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면서 비웃었다.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배은망덕’할 수 있을까? 친구보다 진리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의 이데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 친구이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지만, 이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를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라고 부르는 한, 진리가 문제된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주장을 했다 하더라도 잘못된 이론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친구가 소중하기는 하나, 진리는 더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아리스토텔레스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순자는 “청(靑)은 남(藍)에서 나왔으나 더 푸르고(청출어람) 얼음은 물에서 나왔으나 더 차갑다”고 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를 죽여야 한다. 플라톤도 이런 제자가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친구가 소중하지만 진리는 더욱 소중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 동안 한국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이른바 ‘조국 사태’를 보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이 생각났다. 특정 개인에 대한 호불호(好不好) 때문에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지식인, 언론인 등 온 국민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웠다. 진리는 소중하지 않았다. 그저 내 편인가 아닌가, 친구인가 아닌가, 그것이 전부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를 욕 되게 하는 친구는 사귀지 말라고 했다. 당장은 달콤할지 몰라도 가짜 친구를 사귀는 대가는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 사회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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