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사 순절도(육군사 관학교 박물관), 1592년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 하였을 때 모습을 후에 그린 것이다.
동래부사 순절도(육군사 관학교 박물관), 1592년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 하였을 때 모습을 후에 그린 것이다.

  ‘임진전쟁’이라는 용어는 들어 보았을지 모르겠다. 이미 짐작은 하겠지만 우리가 보통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용어를 달리 부른 것이다. 이와 함께 병자호란도 ‘병자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왜 나타나게 되었을까? 동아시아라는 것은 국가의 틀을 넘어 동아시아를 크게 조망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순한 조망을 넘어 상대에 대한 배려도 담겨 있다. ‘왜란’과 ‘호란’이라 부르는 개념에는 이들 나라나 민족에 대한 비하의 의미가 담겨있다.

  ‘왜(倭)’는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전까지 일본 열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문화적으로 후진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호(胡)’는 중국에서 중원 이외 지역의 나라나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역시 후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과 청은 종래의 국제 관계인 조공 책봉 체제 속에서 소중화사상을 가진 조선의 사대부에게는 후진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용어를 그대로 현대의 역사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난(亂)’이라는 것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왕에 대한 반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들 용어에서는 이를 하나의 정상적인 국가로 인식하지 않은 것이 된다.

  임진전쟁을 부르는 용어가 동아시아 국가들마다 다르다.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각 나라마다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일본의 침략에 ‘조국’을 지켰다는 의미로 국가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의 위협에서 ‘조국’을 지키자는 현재의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는 조선 정벌, 정한 등의 용어를 사용하다가 강제 병합 이후에는 ‘문록, 경장의 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연호인 문록과 경장을 사용한 뒤에 ‘역(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국내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정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최근에는 진보적인 역사 학자들 중에는 ‘조선 침략’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고, 일부 교과서에는 이를 넣은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는 ‘원조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원조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명이 처음에는 조선의 원병 요청을 거부하다가 절반 이상이 일본군에 점령되자 원병을 파견한 것은 자신들을 이해를 위한 것이었다. 즉 일본군의 초기 목적은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정벌하기 위한 길을 빌리다)’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압록강을 넘어 명에서 이루어진다면 자신들의 피해가 크기 때문에 조선에서 막고자 한 것이었다. 

  ‘임진전쟁’은 일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동아시아 질서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 명, 일본이 전쟁을 하는 사이 북쪽에서는 여진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세웠고 이어 청을 건국하였다. 조선에서는 전쟁을 제대로 막지 못한 양반들은 ‘재조지은(再造之恩, 망하게 된 것을 구해준 은혜)’을 주장하였다. 실제 선조를 비롯한 지배층은 도망치기 급급한 반면 일본군과 싸운 것은 의병과 농민들이었다. 전쟁이 마무리되고 상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지배층은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그 공을 송두리째 명에 바쳤다. 송시열의 후예들은 만동묘를 지어 명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정권을 잡아 에도 막부를 열었다. 전쟁은 다른 한편 많은 문물을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2006년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변동을 이해하기 위해 공동의 용어를 고민하였다. 토론 끝에 정해진 명칭이 ‘임진전쟁’이었다. 1592년의 간지를 따서 만든 전쟁의 용어는 무미건조하지만 어느 지역에서나 저항감 없이 쓸 수 있는 용어였다. 동아시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보는 것만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고 느끼는 것도 함께 고려할 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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