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당선작

  낮에 헌츠 포인트의 청과물 공판장에 다녀왔습니다. 빨갛게 익은 자두가 가판대에 나왔더군요. 그 자두를 보니 당신이 계셨던 화정 청소년 수련원이 떠올랐습니다. 안 가본 지 4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수련원치고는 작았으나 마당 전체에 해가 가득해 여름 내내 그늘막을 설치해두곤 했었는데 말이죠. 우리는 종종 그 아래서 더위를 식히곤 했습니다. 수도꼭지와 호스를 연결해 물을 뿌리며 놀고 나면 돗자리 위에 누워서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죠. 저에게 수련원은 집에서 벗어났다는 자체만으로 계속 가게 만드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뉴저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두고 혼자 건너왔습니다.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서요. 왜 핑계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차차 기회가 되면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혼자서 방을 구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부동산에서 몇 날 며칠을 씨름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현기증이 날 정도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적응한 편입니다. 맨해튼 중심부 터미널에서 40분 정도 버스를 타면 뉴저지의 퍼세이익이 보이는데 저는 그곳의 하얀 이층집 왼쪽 맨 끝 방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택은 아니고 빌라 정도라고 여기시면 될까요. 하얀 외벽 사이로 부식된 검은 틈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2층에 있는 방 세 개는 각각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고 저는 그들과 부엌과 화장실을 공유합니다. 냉장고에 간혹 제가 사둔 음식이 사라지면 옆방 사람들과 작은 다툼이 일어나는 일도 잦습니다. 게다가 여기는 도미니카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라 새벽 늦게까지 1층의 술집에서 트는 음악 소리에 쉽게 잠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제 형편에는 이곳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공간이에요. 제 방은 원래 여행객을 위한 숙소로 제공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방에는 작은 옷장과 침대, 욕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책상도 없어서 접이식 탁상을 하나 사서 침대 위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벽에는 그림이 한 점 걸려있어요. 두 여인이 꼭 껴안고 있는 그림인데 아마 집주인이 모조품으로 싸게 산 듯합니다. 저는 옷을 갈아입을 때나 수건으로 머리를 말릴 때 자주 그 그림을 들여다봅니다. 연인일까, 모녀지간 일수도, 친한 친구일 수도 있겠지 라고 추측하면서 말입니다.

  메렝게 풍의 음악이 통 멎어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옆방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네요. 아주머니가 직장에서 돌아오셨나 봅니다. 제 옆방에는 콜롬비아에서 건너온 모자가 살고 있습니다. 처음 그 아들, 후안을 봤을 때는 이미 자랄 만큼 자란 여자애인 줄 알았습니다. 한쪽 눈은 검은색 앞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막 열한 살이 된 남자애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요. 후안은 학교에 가는 날을 제외하고는 주로 집안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주로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 놓거나, 티브이를 보곤 하죠. 술집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후안이 방 안에서 내는 소리에 잠귀가 밝은 저는 종종 불면증에 시달리고는 합니다.

  제가 요즘 거주하는 곳은 이러합니다. 어떻게 이 편지를 시작해야 할지를 몰라 오래 고민했지만, 그냥 생각이 미치는 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낮에 본 가판대 위의 다홍색 자두 때문에 당신이 떠올랐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종종 당신을 기억했습니다. 아침에 프렌치토스트를 부쳐 먹을 때, 길을 걷다 활짝 핀 튤립을 마주칠 때, 방에 혼자 누워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을 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당신께 마음속으로만 속삭이는 일에 그치지 않고 글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한 까닭은 한 달 전, 함께 모임 활동을 했던 지우 언니에게서 전화를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우 언니, 골리앗이라는 세례명으로 불렸던 그녀를 수녀님도 물론 잊지 않고 계시겠지요. 남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심지어 남성마저도 많이 쓰지는 않는 그 세례명이 언니와는 꽤 잘 어울렸죠. 언니는 요즘 스튜어디스로 일하고 있습니다. 언니의 선한 인상은 사람에게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니 꽤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로 보지는 못했으나 그 후 2년 동안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미카엘라의 기일이나 크리스마스처럼 서로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그럴 때 말입니다.

  “미국은 어때?”

  “살 만해요.”

  “추석 지나고 나서 미국으로 비행갈 수도 있는데 그때 한번 보자.”

  수화기 너머에서 언니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자두 수녀님 기억하지?”

  기억하냐는 질문이 야속하게 들릴 정도였습니다. 저만큼 당신을 오래 추억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장담했으니까요.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가을, 학교 뒷산 너머에 있던 청소년 수련원으로 야영을 갔을 때입니다. 캠프파이어를 진행하면서 당신은 자신을 자두 수녀라고 소개했습니다. 얼굴이 시시때때로 자두색이 되어 그런 별명을 갖게 되셨다지만 자두처럼 붉은 얼굴과 달리 당신은 철없는 애들의 낯 뜨거운 질문에도 큰 윗니를 드러내며 웃어넘겼습니다. 머리의 검은 베일은 당신이 걸을 때마다 찰랑거렸습니다. 수녀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겸손한 자세와 조용하고 차분한 이미지가 그려졌는데, 자주 걷어 올려있는 소매와 치맛단에 묻은 얼룩들은 어찌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던지. 당신은 치아도, 발도, 얼굴도 큰 사람이었습니다. 웃음소리마저도. 누군가는 당신이 내는 소리가 쇳소리 같다며 듣기 싫다고 투덜거렸으나 저에게는 매력적인 허스키함으로 들렸어요. 저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었고,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갔던 성당에 다닌다고 자랑하듯 말했었죠. 그렇게 저는 카타레나에 발을 들이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교구 뿐 아니라 까리타스를 나오셨대. 아예 수녀 옷을 벗으신 것 같더라고.”

  저는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본 어떤 수녀님들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가 정직해 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4년 동안, 당신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

 

  저는 맨해튼에서 희곡집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의 파트 타임 점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희곡집만 팔다 보니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아 힘들지는 않습니다. 사장님은 손님이 찾지 않는 이상 카운터보다는 서점 한가운데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냅니다. 이곳 사람들은 대화할 때 자꾸 눈을 보려는 성향이 강해 저는 최대한 거리를 둔 채 멀리서 지켜보는 편입니다. 누군가 제 눈을 보는 걸 이젠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한 블록만 건너가면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번화가지만 이상하리만큼 이곳은 조용합니다. 저는 헬렌이라고 쓰인 명찰을 달고 책을 분류하는 작업을 합니다. , 헬렌이라는 이름은 당신이 나를 부르시던 헬레나라는 세례명에서 따온 것이지요.

  서점으로 누군가 저를 찾아온 적이 없으니 단정한 유니폼 차림의 지우 언니는 사장님과 그 친구분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년 만에 만난 언니는 여전히 건강한 미소를 잃지 않았더군요. 언니는 지금도 까리타스 수도회 수녀님들과 봉사를 다닌다고 했습니다. 왼손에 끼워진 묵주반지는 은에서 금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금반지가 주는 분위기 때문일까요. 언니에게서 느껴지는 신실함이랄까, 견고함이랄까. 너무 굳건해 보여서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는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비행 일정이 바쁠 텐데 틈틈이 봉사하러 다니는 언니의 신앙심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그간 보지 못하고 지낸 시간이 저희를 어색하게 만들었으나 당신이 수도회를 떠난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꼭 대화를 나눠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녀님이 나 한참 까리타스 서원에 들어가려고 준비했을 당시에 말이야. 추천서 안 써주셨어. 극구 반대하셨지.”

  언니가 수녀님을 준비하다 포기했던 일은 알고 있었음에도 그 이유에 당신이 포함되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17살이 되던 해, 언니는 다니던 대학교를 휴학하고 머리를 짧게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카타레나 모임에 와서 예전부터 바래 오던 수녀님의 길을 걷고 싶다고 선언했었죠. 당신은 우리 앞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대했던 축하와 격려 역시. 저는 당연히 당신이 언니의 선언을 지지해줄 거라고 확신했어요. 성당에서는 새 수녀님이나 신부님이 나오면 잔치를 벌였으니까요. 저는 언니에게 반대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카타리나가 아니라 카타레나여서 아닐까.”

  기독교의 전설적인 순교 성녀 카타레나를 누군가는 카타리나라 부르고, 누군가는 카테리나라 불렀지만 우리는 카타레나라 부르기로 했었죠. 한끝의 차이일지라도 우리만의 이름이고 싶었으니까요.

  야영 때 주고받은 전화번호가 계기가 되어 이주에 한 번 모이는 성서 모임에 가기 위해 집 뒷산을 넘었습니다. 카타레나 모임에는 일곱 가지의 규칙이 있었던 걸 기억하시나요. 십계명이나 성경 말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저희 입맛대로 바꾼 것이었지요. 개중에는 당신이 낸 의견도 들어있었습니다. 어떤 규칙이 있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몇 개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규칙들을 한 번씩 큰소리로 외고는 모임을 시작했으니까요. 윗니가 다 보이게 웃어라. 아침에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들여라. 일주일에 한 번은 달리기를 해라, 등등. 종교모임의 성격에 들어맞지 않는 규칙이었지만 저는 열심히 따랐습니다. 남들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질 나이였으니까요. 자유롭게 정해진 규칙만큼이나 모임 역시 자유로웠습니다. 이따금 창세기를 소리 내어 읽기도 했지만 주로 시간을 노는 데 보냈습니다. 배가 고프면 곧장 주방으로 달려가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 먹었고, 날씨가 선선하면 뒷산 정상에 올라가 피크닉을 즐겼어요. 뒷산 정상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있으면 당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저와 지우 언니는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쏟아지는 졸음을 찾으며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요. 당신의 몸은 제 머리를 다 받치고도 남을 만큼 거대하고 따뜻했습니다. 당신이 열일곱 살의 우리에게 자주 하던 얘기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성관계라는 것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야 하며,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혼전순결이라는 단어가 얼핏얼핏 들려오기도 했죠. 평소에 말을 툭툭 내뱉던 미카엘라는 당신에게 대놓고 물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러면 남자들이 아무도 안 만나 준다고요. 당신은 큰 윗니가 다 보이게 웃으며 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미카엘라를 소중하게 여겨줄 사람을 꼭 보내 주실 거야.”

  카타레나라는 단어를 다시금 상기하니 미카엘라에게 큰 윗니를 보이며 웃던 당신의 그때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기억이 희미한 나이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처럼요.

  “아무도 얘기를 안 해주더라고.”

  반응 없이 앉아있는 저에게 지우 언니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수녀님이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지금은 어디 계신지,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그러다 수녀님들 중 누군가 지우 언니에게 넌지시 당신이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을 흘려주었다고 합니다. 언니가 떠날 수밖에, 라고 하는 말이 저는 조금 어색하게 들렸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당신은 ~할 수밖에, 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 아니었던가요.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어찌 됐든 나에겐 소중한 분이셨고 또.”

  “억울하기도 했겠지.”

  지우 언니는 자신의 팔을 쓸어내렸습니다.

  언니는 비행이 오프일 때마다 당신과 친하게 지내던 수녀님들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당신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알려주려는 사람 역시. 언니는 다른 수녀님들의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괜히 말려들었다가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한 번도 서울에서 지낸 적이 없던 당신이 왜 서울로 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수도회 수녀님들의 냉랭한 반응도 어떨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갔습니다. 종신 서원을 끝마친 수녀가 직함에서 물러난다는 건, 머릿속에 쉬이 그리기 어려운 일이니까요. 당신이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언니에게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습니다. 그 질문을 하면 언니의 입에서 무언가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았거든요.

  서울을 다 뒤져 찾아낸 당신은 C 대학교의 구내식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언니는 김밥을 말고, 라면을 끓이는 당신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고 해요. 이 얘기를 전하는 언니는 놀라울 만큼 담담했고 아주 먼 곳을 응시하는 듯 느껴졌습니다. 저는 식당 주방에 있을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어요. 제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밖이라고 여겨졌으니까요.

  언니가 떠나고 나서 저는 새로 들어온 희곡집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점에서 하는 일 중 가장 좋아하는 작업입니다. 별 규칙 없이 박스 안에 담겨있던 책들을 제 손으로 자리를 잡게 해주는 점이 좋습니다. 갓 들어온 책에서 느껴지는 그 부드러운 감촉이란. 희곡집들을 손으로 한 번씩 쓸어 책장에 넣은 뒤 꽂혀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왜 언니가 수녀가 되는 것을 반대했을까요. 당신은 왜 베일을 벗었을까요. 저는 당신의 베일을 훔쳐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출장을 가시던 밤마다 저는 당신이 계신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더불어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저는 당신과 같은 이부자리에 누웠고요. 언제나 당신보다 늦게 잠이 들었죠. 베일을 벗은 채 잠든 당신의 머리칼을 만지는 게 제가 그곳으로 향하는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베일 속에 감춰두기엔 아까운 머릿결이었습니다. 당신의 머리에서는 시원하게 향냄새가 풍겼죠. 부활절이나, 성탄절 때 피우는 향냄새는 코 안쪽이 시릴만큼 독한데 왜 당신에게서 날 때는 자꾸만 맡고 싶어졌을까요. 저는 베일을 벗은 당신의 모습을 늦은 새벽까지 응시하곤 했습니다. 한평생 그리스도와 결혼하여, 그리스도를 정배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의 베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왜 수녀님은 실체도 없는 신만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때의 저는 당신을 밤새도록 바라보기만 하는 일이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하루는 잠들기 직전의 당신에게 물었죠. 왜 당신의 얼굴은 자주 빨개지는 것이냐고.

  “헬레나야, 그건 주님이 내게 사랑을 주시는 중이라는 뜻이란다. 광합성 같은 거지.”

  저는 당신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당신의 머리맡에 놓인 검은 베일을 뒷산으로 가져가 아무도 모를 곳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질투가 났었나 봅니다. 그때의 베일 도둑이 저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겠죠. 아침에 일어나 없어진 베일을 보고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랬던 당신이. 모든 자신의 일들을 하느님의 것으로 돌렸던 당신이 왜. 저는 궁금합니다. 남들은 평생의 업으로 삼는 수녀 직을 무엇 때문에 그만둔 것인지. 일전에 뉴스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신부와 수녀가 사랑에 빠져 둘 다 카톨릭 교구에서 파면당하고 가정을 이뤄 살아가고 있다고.

 

*

 

  열일곱 살이 되던 봄, 집을 나갔던 엄마를 수소문 끝에 나주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엄마를 다시 만날 마음이 없었습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엄마라는 단어를 곱씹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오른쪽 눈 바로 아래에 있는 갈색 점입니다. 눈 바로 아래에 있어서 혹시나 저 점이 눈을 찌르지는 않을까 염려했었거든요. 그 점이 엄마를 신비하게 느껴지게 해서 자꾸만 눈 밑의 점을 찾았었죠. 당신은 시간이 더 흘러 후회할 수 있으니 얼굴이라도 보고 오자고 하셨어요. 하지만 역시 엄마는 제 얼굴조차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손길이 그립고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차가운 엄마의 반응이 왜 저를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당신의 어깨에 기대 저는 한참을 숨죽이며 앉아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신은 묵주 알을 굴리며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죠. 성모송을 중얼거리는 당신의 목소리. 만나지 못한 엄마보다도 어쩌면 저를 옆에 두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당신, 그리고 그런 당신을 바라보는 제 자신의 모습이 더 저를 혼자 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수녀님, 저는 이곳에 와서 후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애는 5달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처음 후안의 방에서 들려오는 큰 음악소리, 웃음소리는 정신 나간 사춘기의 여자애가 있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가 일하러 나가고 없는 그 방에는 후안 혼자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그 집에는 저, 주인아저씨, 후안과 그의 엄마가 살고 있었는데, 주인아저씨와 옆방 아주머니는 주로 밤늦게 일에서 돌아왔으므로 저와 후안 단둘이 있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제가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으면 후안이 방문을 살짝 열어 제가 하는 행동들을 지켜본다는 걸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무슨 말이라도 걸까 하여 그를 향하면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곤 했어요. 한 달 정도가 지나고 난 뒤에는 제가 집에 들어오고 나면 아예 부엌으로 나와 저를 계속해서 살폈습니다. 후안은 왜 그랬을까요. 저는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후안은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왔고, I 라는 주어에 is를 붙여서 말할 만큼 영어 실력은 서툴렀습니다. 나이도 어린데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뛰어놀 법도 했죠. 하지만 이주민들 속에서 제 삼의 이방인은 섞이기 어려운 존재임을 후안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후안은 약에는 손을 대지 않았어요. 근방에 사는 도미니칸 아이들의 대부분은 대마나 마리화나에 손을 대는 일이 빈번했지만요.

  저는 말 한마디 제대로 통하지 않는 후안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핸드폰과 티브이로만 세상과 소통하는 아이라고 느껴졌으니까요. 게다가 빈번하게 들려오는 엄마의 고함과 후안의 울음소리까지. 저는 당신이라면 분명 저 아이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카타레나의 여자들은 언제나 이웃의 고통을 모른척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신과 제가 지켰던 다섯 번째 규칙이었으니까요. 저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부엌에 가만히 앉아 요리하는 저를 바라보는 후안에게 만든 요리 접시를 내밀었습니다. 핸드폰 번역기를 돌려 밥을 함께 먹자는 제안을 했죠. 후안은 도망가지 않고 접시를 말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식사하는 내내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없었지만 저는 후안이 핸드폰으로 보는 영상을 같이 시청했습니다. 에스파냐 말이 흘러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이었고요.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 아이에게 저는 충분히 손을 내밀고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같이 밥을 먹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제 안의 또 다른 자신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는 이미 그 규칙을 어겼어.

 

  미카엘라가 죽은 지도 4년째네요. 카타레나에서 가장 똑똑했던 미카엘라. 실은 수녀님께 그때의 일에 관해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찬바람이 매섭던 11월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녀는 손을 계속해서 떨고 있었어요. 실수로 생긴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가야 하는데 너무 무서우니, 함께 가달라고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왜 하필 저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녀와 딱히 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아마 집에는 알리기 어려운 처지였을 겁니다. 미카엘라네 집은 삼 남매가 전부 천사의 이름을 세례명을 쓰는 집이었습니다. 가브리엘라, 미카엘라, 라파엘. 주일에는 온 가족이 성당에서 전례를 보고, 성가대 활동을 하는 그런 집 말입니다. 저는 최대한 어른처럼 보여 보호자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구두를 신고 짙은 화장을 한 뒤에 병원에 따라갔습니다. 약속보다 일찍 도착하여 병원 카운터 앞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죠. 처음 가보는 산부인과였습니다. 배가 부른 여자들, 제 나이 또래 되어 보이는 여자들, 부인과 함께 온 남자들. 저는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었고 또 그래야 했습니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간호사가 저를 한참 동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채 되기도 전에 저는 그대로 병원을 빠져나와 도망쳤습니다. 제 본분에 맞지 않은 일이라 느꼈고 그와 더불어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당신의 신념에 반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믿는 종교의 법칙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왜 몰랐을까요. 저는 이미 오류에 빠져있다는 걸요. 당신이 수녀님이 아니기를 바랐던 그때부터 저는 카톨릭의 도리에 어긋나있었음을. 당신이 믿는 신은 미카엘라가 무엇을 하더라도 껴안아 줬을 텐데요.

  미카엘라의 장례식에서, 당신은 매우 수척해 보였습니다. 성서 모임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다들 숨죽여 울면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수련원 원장 수녀님께서 그녀의 장례미사 참석을 반대했다고 하더군요. 자살은 하느님께 짓는 죄라면서. 장례미사를 거행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당신은 원장 수녀님에게 맞서고 있었습니다. 원장 수녀님의 말은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자살한 사람의 장례미사가 허용된 지 시간은 꽤 지났으나 원장 수녀님은 오래된 가톨릭 성서의 교리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정직하게 무릎을 꿇은 채 십자가 앞에서 빠른 속도로 어떤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미카엘라를 위한 기도였겠죠. 순결을 지키라고 가르쳤던 분은 수녀님 당신인데,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항상 큰 윗니를 드러내고 웃음을 지어주던 당신이, 미카엘라에게는 옷깃을 다 적실 정도로 울고 계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당신에 대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입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난 후로 모든 일은 급속도로 흘러갔습니다. 수녀님은 수련원을 떠나야 했고, 저희 모임은 자연스럽게 흩어졌죠. 당신이 부산의 어느 성당으로 파견되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저희에게 남긴 연락처도, 주소도 없었기 때문에 당신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당신의 소식을 찾아 나설 수 없었죠. 연락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눠도 저희는 마음속으로 미카엘라를 떠올릴 게 분명했고요. 저는 그 애를 원망했어요. 그녀 때문에 당신을 잃은 것만 같아서. 그렇게 저는 당신을 다시 볼 수 없었고 누구나 그러하듯 평범하지만 때때로 상실감에 빠졌다가 돌아오는 그런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어요.

*

 

  오늘 아침에 후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부엌 식탁에 우편물들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제 앞으로 오는 우편물은 거의 없기에 잘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식탁 위에 어질러져 있는 우편물들을 정리하다가 한국어로 쓰인 봉투를 하나 발견했어요.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듯, 각진 글씨체로 쓰인 영어 주소와 한글 이름, 정경호. 아버지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누가 봐도 제 앞으로 온 편지였는데 봉투 끝이 너덜너덜하게 뜯겨있었습니다. 어차피 한글로 쓰여 있을 텐데도 저는 아버지와 저의 일을 마치 후안이 훔쳐본 것만 같아서, 그게 부끄럽고 낯 뜨거워서 아직 자고 있을 후안의 방문을 세게 두들겼습니다.

  내 것 좀 가만히 놔둬!

  닫혀있는 방문에 대고 한국말로 소리를 지르고 뉴저지에서 맨해튼으로 넘어오는 버스 안에서 제가 왜 그랬는지 후회했습니다. 어째서 고작 편지 한 통이 부끄러웠는지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제가 미국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타지로 떠나버리고, 저는 고등학교 3학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만나던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출장이 줄어들어 집에 있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죠.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튀어나온 코를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간혹 눈을 뚫어져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의 눈에 뭐가 묻어있거나, 나는 너를 믿고 있다는 신뢰감을 주려고 할 때 눈을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제 눈에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고, 신뢰감과는 관련이 없는 경우라면 그 시선이 이상하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아버지는 저와 아무리 사소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제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습니다. 눈을 맞춘다는 느낌보다는 제 동공 안쪽 깊숙한 곳에 어떤 사물이 들어있다는 듯이. 이런 날은 반복되었습니다. 어딘가 불편하기도 했으나 아버지의 습관이려니 했습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된 생일날,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불을 끈 채 아버지가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무더운 여름의 한가운데에 타오르는 촛불을 보니 콧등으로 흐르는 땀이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 케이크를 먹었어요. 저는 의례적이지만 생일날 딸이 부모에게 하는 그런 말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했습니다.

  길러주셔서 고마워요, 아빠.

  내 두 눈을 보고 말해줄래?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내 두 눈을 봐 줘.

  아버지의 눈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저는 케이크를 삼키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진심을 담아 그 문장을 반복해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엄마 눈을 찌를 듯했던 그 점이 생각났습니다. 그날 이후로 모아두었던 아르바이트 비용을 모두 털어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한 것이죠. 지난 1년간 메신저로 연락이 오거나 했지만 적응할 만하냐는 안부 인사일 뿐 직접 쓴 글씨를 받아본 적은 없었습니다. 편지 한 통이 마치 아버지가 미국에 저를 찾아온 기분을 느끼게 했습니다. 버스 안에서도 서점으로 출근한 뒤에도 저는 봉투 안에 담겨있는 편지를 꺼내보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저에게 또 무언가를 바라는 내용이 담겨있다면 저는 이제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서점에 도착해 창고에 있던 히터를 서점 한가운데에 배치해두었습니다. 청소를 끝낸 뒤에 커피를 한 잔 내려 히터 앞에 앉았습니다. 자주 들리시던 수녀님 한 분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흰색 베일을 두른 것으로 보아 수련 중인 듯한 수녀님인데, 희곡에 관심이 많은지 자주 들리시곤 합니다. 자연스레 그녀와 대화를 몇 번 나눴고 서원 모임에서 학생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당신처럼 자주 빨개지는 얼굴 때문이었습니다. 가게 안팎의 온도 차가 심할수록 그녀의 얼굴은 곧잘 빨개졌죠. 그녀는 장갑에 붙은 눈이 녹아 바닥을 더럽히지 않도록 히터 옆 의자에 장갑과 목도리를 걸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닉 페인의 희곡 하나를 골라 난로 앞에 앉았죠. 그녀는 저에게 날이 춥지 않냐는 안부의 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습니다. 제 표정이 좋지 않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머릿속이 시끄럽다고 답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될까요. 저는 저도 모르는 새에 저의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왜 그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 오랜 시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말, 저 자신도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어 계속 맴돌기만 했던 저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꺼내고 싶어 누군가 물어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수녀님은 희곡집을 닫아둔 채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길고 장황한 얘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를 몰라 우물쭈물 대는 저를 잠시 지켜보던 수녀님은 의자에 걸려있던 장갑과 목도리를 몸에 둘렀습니다. 목도리를 단단히 여민 후에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 또 들를게요, 헬렌.”

 

*

 

  맨해튼에는 눈이 쌓였습니다. 그곳에도 눈이 내렸으려나요. 저는 요즘 서점에 자주 오시는 그 수녀님이 주최하는 연극 모임에 나가고 있습니다. 연극을 배워본 적도 없고, 연기하는 제 모습이 어색하지만 남을 잘 연기하기 위해 저 자신을 많이 생각하며 지내는 편입니다. 계속 이렇게 연습하다 보면, 봄에는 성당에서 작은 연극을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겨울의 뉴욕을 눈에 담기 위해 천천히 걸었습니다. 다운사이드로 계속 걷다 보니 남쪽 끝에 있는 배터리파크까지 도달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지하철을 타야겠다고 생각하고선 벤치에 앉아 허드슨강을 바라보았어요. 브루클린 다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해가 질 무렵에 브루클린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맨해튼의 풍경은 그 어떤 사진기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요. 브루클린 다리를 처음 건넜을 때가 생각납니다. 저는 그곳을 지날 때, 이 아름다운 순간을 당신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핸드폰으로 몇 장 찍었지만, 다리를 다 건너고 나서 저는 이 사진들을 당신에게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핸드폰 번호도, 사는 곳도 모르기 때문이죠. 다리의 입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눈물이 나지는 않았어요. 대신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를 꺼내 읽었습니다.

  지우 언니가 당신을 찾아간 날, 언니는 당신 몰래 푸드코트의 음식을 시켜 먹었다고 합니다. 언니는 자신이 왜 그곳에 갔는지 혼란스러웠다고 말하더군요. 잔반을 버리고 식당을 지나쳐 나오면서 언니는 당신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큰 윗니를 다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지요. 여전히 자두 같은 얼굴로, 여전히 맑은 얼굴로 언니를 향해. 저는 카타레나의 규칙을 수도 없이 어겼습니다. 우리가 함께한 그 날들은 이제 돌아오지 않겠지요. 당신이 예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죠. 당신의 얼굴이 붉은 이유는 주님이 당신에게 사랑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여전히 붉은 얼굴을 갖고 살아가는 당신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나 봅니다. 그건 당신이 수녀님이고, 수녀님이 아닌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낯선 땅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당신을 저는 아마 한동안 계속 생각할 것입니다. 검은 베일 대신 하얀 위생 모자를 쓰고 김밥을 마는 당신의 모습을. 편지를 쓰다 보니 잊고 있던 우리의 마지막 규칙이 떠올랐습니다. 카타레나의 여자들로서 우리가 잡은 손을 놓지 말아라. 당신이 수녀가 되고 싶어 한 지우 언니를 어째서 외면했는지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갑니다. 언니의 말대로 우린 카타레나니까요.

  시끄럽게 울어대던 음악이 멎어 정적이 찾아왔습니다. 내일을 위해 이만 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침에 주인아저씨에게 에스파냐어를 배우기로 약속했거든요. 후안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수녀님, 어디에서든 주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소설 부문 심사평

  총 11편의 응모작들 중 네 편을 흥미롭게 읽었다. 어떤 응모작은 재치와 신선한 아이디어가, 어떤 응모작은 결말에서 느껴지는 깊은 울림이 있어서 네 편 다 심사위원들에게는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자니 다른 해보다 엄격하게 심사기준을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강민서의 <신(神)>은 신이 그려져 있는 액자를 산 젊은 부부의 이야기다. 그들은 액자에 맞는 자리를 찾기 위해 집 곳곳에 못의 구멍을 내고 만다. 그 과정의 인과들이 자연스럽다는 장점은 돋보였으나 결국 이 응모작이 소품에 그치고 만 이유는 긴장을 잃고 끝나버리는 결말에 크게 있다. 보다 공들여서 수정한다면 더 의미 있는 단편소설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김은미의 <주란에게 노랑을>은 유려하게 흘러가는 문장과 달리, 제목의 감각적 느낌과 서간체 형식의 이유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가장 큰 문제가 소설 중반 이후로,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집중해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남겼다는데 심사위원들은 동의했다. 수정할 때 수신자가 왜 어머니인가, 하는 질문부터 시작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 싶다. 

  장경동의 <내 아버지와 홍도>는 제목부터 ‘홍도’는 누구인가, 라는 호기심을 갖게 한다. ‘나’라는 인물이 제주에 내려가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나며 겪는 일화들이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는 점도 좋았다. ‘가족’에 속하는 구성원이나 개인이 겪는 갈등의 변화를 보여주면서도 독자에게 가족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도. 그러나 군데군데 허투루 쓰는 문장들과 소설 전체의 톤tone을 지나치게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점에 대해서는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당선작을 정유정의 <카타레나의 여자들>로 선정하는 데 심사위원들을 흔쾌히 동의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소설의 ‘의미’에 관해서, 그리고 서간체 형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수신자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하고 쓴 흔적이 엿보였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서 겪게 되는 변화와 깨달음에 대해서도. 특히 독자는 이 응모작을 읽게 된다면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영향을 준 누군가에 관해 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힘이 아닐까. 다만, 시점인물이 미국으로 떠나게 되는 인과는 다시 고민해 보기 바란다. 

  올해 심사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완성도 면에서 결함이 덜 하며, 의미 있는 결말을 보여준 응모작을 먼저 선택하기. 수상자들에게는 축하를, 모든 응모자들에게 건필을 기원한다. 

이재룡 교수(불어불문학과)
조경란 교수(문예창작전공)

 

수상소감

  멋진 졸업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뉴욕을 처음 가게 된 건 17년도 여름, 영문과 교수님들께서 사비를 보태 해외문화탐방에 보내주셨을 때입니다. 그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려운 시간을 잘 이겨내고 있는 우리 가족. 나는 이렇게 천천히 내 길을 갈 테니 걱정하지 말아줘. 오래 건강하자. 

  애증의 숭대극회와 소설 수업을 추천해 줬던 내 첫 연출님이 없었다면 저는 글쓰기를 도전해 볼 수나 있었을까요. 

  이 글을 자기 것처럼 사랑해주고 합평해준 소설창작 사람들, 당신들이 최고야.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조경란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극 동아리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건, 타인이 되어 글을 쓴다는 건 너무도 어렵습니다. 어느 연극 속에도, 소설 속에도 제가 있습니다. 이래도 괜찮다면, 저는 몇 번이고 자신에게서 시작하겠습니다. 언젠가 한 사람의 인생을 자연스럽고 말이 되게 그려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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