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자료: 매일경제)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자료: 매일경제)

  지난주 한국과 아세안의 정상이 모이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포털이나 언론에서 이를 제대로 다루는 것을 보지 못했다. 1면 기사를 장식한 것은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단식 농성이었다. 언론의 쏠림 현상은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이다. 조국 국면에서 몇 장에 걸쳐 지면과 방송을 쏟아대던 언론은 정상회의에 대해서는 잠잠했다. 미국, 중국이나 일본 같았으면 벌써 1면을 장식하고 각종 기사를 쏟아내었을 것이다.

  왜 이럴까? 필자는 언론의 무지와 사대 인식 때문이라 생각한다. 언론은 이들 국가의 중요성이나 그들의 문화에 대한 심도있게 축적된 자료와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니 쓸 수가 없다. 설령 있다 해도 그들의 관심을 대외관계라 하면 4강에 대한, 대북 관계에 대한 것이 톱으로 나와야 한다는 사대 근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것의 뿌리는 아마도 정부 정책 탓도 클 것이다. 외교관은 대미통이어야 출세를 하고, 언론에서도 미국 특파원 출신이어야 행세를 하니 당연히 그쪽만 보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네 대부분의 인식 속에 4강과 유럽 이외의 나라는 무시될 수 있는 우리보다 후진국이라는 생각이 마음 깊숙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근대적인 조공 책봉과 사대 외교가 아직도 잠재 의식 속에 남아 있다. 중국이 미국으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대미통이라는 자부심은 몽골 간섭기 몽골 복장을 하고, 몽골 이름을 썼던 권문세족이나 일제 강점기 일본식 복장과 이름을 자랑스레 썼던 것과 기반은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한국사 교과서에 ‘대왕’이라 기록된 왕은 광개토왕뿐이다. 혹자는 세종대왕은? 광화문 거리의 동상은 ‘세종대왕’이지만 교과서는 그냥 세종일 뿐이다. 그럼 광개토왕은 왜 ‘대왕’이 되었을까? 광개토대왕비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 그러나 광개토왕비에도 대왕이라는 내용은 없다. 다만 왕의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를 줄여 ‘호태왕비’라 부르고 이를 대왕이라 하는 것이다. 그는 왜 대왕일까? 만주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였기 때문이다. 

  광개토왕의 만주 정벌이 영토 확장이라면 거란이나 몽골이 우리를 쳐들어 온 것도 그들의 영토 확장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역사는 우리 입장에서 쓰는 것이니 그것은 당치도 않다. 다만 고려를 쳐들어 온 거란을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등의 칭호를 쓰는 것은 은연 중 그들에 대한 비하가 담겨있음을 알 필요는 있다. 거란은 나라 이름이었으며, 거란에는 거란족만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거란족이 아닌 거란이라 써야 할 것이다. 이후 이들은 요, 금, 원이라 나라 이름을 정했으니 그 국호로 서술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그 영역이 애매한 것처럼 다양한 자연 환경을 갖고 있다. 중원 지역을 쳐들어 오는 유목 민족을 향해 자신들은 문화적으로 종족적으로 우월하다는 중화 의식이 본격화된 것은 송대였다. 이를 강화한 것이 성리학의 명분론이다. 명이 망한 후 진정한 중화가 없어졌기 때문에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을 소중화라 하였다. 청은 사대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의식은 당연히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었다. 그들은 야만이고 우리의 문화를 받아 배웠다. 그런데 오히려 조선을 침략한 배은망덕한 족속이라는 것이 일본에 대한 감정적 인식이다.

  그러니 일본의 발전에 대하여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부정할 수 없으니 스포츠에서만이라도 이겨야 한다. 특히 축구와 야구같은 국기인 경우에는.

  유목 지역 사람들의 삶은 그들이 야만스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환경에서 최선의 생활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야만스러웠다면 아마도 그들은 멸종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해양에 주거 기반을 두고 있는 아세안의 국가들도 바다를 토대로 번영을 구가하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인구와 경제 면에서 우리와 가까운 이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강에 돌려 있는 시선을 조금만 그곳으로 돌려 그들을 동료와 맞이할 수 있다면  품격과 함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열 번에 걸쳐 동아시아에 대한 두서없는 글을 게재하였다. 내 안에 갇혀있는 동아시아의 틀을 깨고 좀더 객관적으로 좀더 개방된 시선으로 우리 주변을 보자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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