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레터』의 국내 개봉 당시 포스터 속에서 고개 들어 허공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옆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아 미용실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 결과 나는 숱 많고 굵은 머리카락 덕분에 ‘하이바(안전모)’라는 별명으로 잠깐 불렸을 뿐,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컸다. 이와 같은 씁쓸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내게 눈처럼 깨끗하고 아련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탄성과 한숨을 자아내는 안타까운 도서 카드 한 장. 그것은 오랜 시간 도서관에 잠들어 있다가 비로소 상대방에게 도달한 고백이다. 최종 목적지인 여자의 손에 도달한 때, 그 고백을 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이츠키(남자)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츠키(여자)는 그의 고백에 화답하여 연인이 되었을까, 아니면 너무 늦게 찾아가 이미 새로운 연인(히로코)을 만난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까? 어느 경우이건 남자는 여자의 늦은 대답을 원망할 수 없다. 둘 사이의 사랑 고백은 격지자(隔地者) 사이의 의사표시이기 때문이다. 대화자(對話者) 사이의 의사표시와 달리 의사표시가 발화되어 상대방이 인지하게 되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걸리는 격지자의 경우-가령 장소적으로 떨어져 있어서 서면 등으로 의사표시를 하는 때-에는 네 단계를 거쳐 효력이 발생한다. 먼저 표의자는 의사를 드러내고(表白) 이를 발송한다(發信). 그러면 상대방이 이것을 수령하여(到達) 최종적으로 인지한다(了知). 이 과정에서 모종의 이유로 상대방이 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위험이 있기에 민법은 원칙적으로 도달주의를 취하여 의사표시가 상대방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에 도달한 때에 그 효력이 발생하도록 하고 있다(민법 제111조). 그러니까 이츠키(남자)는 부끄럽더라도 제대로 된 편지를 최소한 상대방이 사는 집 우편함에 넣기까지는 했어야 했다.

  사회생활에서 개인 사이의 교섭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속 의식 작용은 법의 세계에서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다. 내심은 외부에 표시되어야 비로소 본래 의도한 의미를 가진다. 물론 묵시적 거동도 때에 따라 의사표시와 같은 효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명시적 의사표시에 비견할 바가 아니다. 스스로 독립하여 사고하고, 그 효과를 인식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책임을 감수하고 이루어지는 發話가 가장 확실한 효과를 빚어낸다. 민법은 법률행위의 개념(의사표시는 법률행위의 필수요소인데 법률행위는 민법상 법률요건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이다)을 통해 개인의 의사표시 행위를 법률 요건으로 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법률효과를 인정하고자한다. 이는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여 그가 원하는바에 따라 법률관계를 형성하도록 하겠다는 근대사법의 원칙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남주인공의 고백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내일 떠날 사람이 무슨 가능성을 믿고 반납할 책(그것도 읽을 마음이 절대 안 생길 것 같은 제목의 두꺼운 책) 속에 애매한 사랑 고백을 남겨두었단 말인가. 물론 그게 제대로 전달되었다면 이 영화의 아스라하고 안타까운 결말은 불가능했겠지만.

  남자는 등반 중 조난을 당하고 평소에 질색하는 듯 보였던 여가수의 노래를 죽기 직전에 부른다. 그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 에피소드는 남자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본다. 진지한 분위기를 민망해 하고 좋은 것을 대놓고 좋다고 말하지 못하는 성격의 남자.

  이런 남자와 대조적으로 히로코의 의사표시는 법적 시각에서 참 모범적이다. 남자가 프로포즈를 망설이는 동안 결혼하자는 말을 먼저 꺼내는 것, 그녀를 사랑하는 선배에게 죽은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주저 없이 토로하는 것, 설산에 대고 소리치는 그 유명한 “오겡끼 데스까”에 이르기까지 히로코의 화법은 밀당도 어장관리도 없이 시종일관 정확하게 상대방을 향한 직설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적절한 표정관리, 취사선택한 정보만 흘리기, 되면 되고 안되면 말고 식의 간보기가 손해 안 보고 사는 요령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영화 속 히로코의 말들이 더 신선하다. 잊지 못할 연인의 흔적을 찾아왔다가 과거의 첫사랑을 만나 본의 아니게 메신저 역할이 되고 말았지만. 글쎄, 내 눈에는 그녀가 진짜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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