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세상이 색칠 되어가는 아름다운 계절, 봄이다. 따뜻한 날씨와 이유 없는 설렘으로 괜히 들뜨는 계절. 하지만 부푼 마음속에서도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다.

  1947년 3월 1일, 3만 여명의 제주도 주민들은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관덕정에 모였다. 행사가 끝나갈 때쯤 어린 아이가 경찰이 타고 지나가는 말에 치여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아이를 무시한 채 그냥 지나가는 경찰에게 도민들은 항의했고, 이에 대한 경찰의 반응은 총격과 도민 6명의 죽음이었다. 항의를 위해 도민들은 민관 합동 총파업에 나섰다. 미국은 이 시점부터 제주도를 좌익 본거지로 규정했다.

  해방 후 인구가 급증하고, 연속되는 흉년과 미군정의 공출로 제주도민들의 삶은 척박해졌다. 도민들의 비판이 거세지자 육지의 경찰들과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이 계속해서 제주도로 내려왔다. 이들은 제주의 경제적 상황과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기 보다는 ‘빨갱이’로 규정하고 이용하려 했다.

  결국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단체를 습격하며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미군정은 남로당 제주도당을 강경 진압했다. 더불어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 선거구 2곳만이 투표율 미달로 무효화되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섬 전체에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무고한 도민들은 폭도로 간주되었고,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에 걸쳐 지속되며 약 3만명 정도의 도민들이 희생되었다.

  한국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지만 우리는 4.3에 대해 잘 모른 채 오랜 세월을 지나왔다. 육지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4.3을 겪은 후 유족들은 제주에서조차 차별을 겪어야 했다. 동네에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고, 관련자 가족들의 신원을 사찰당국이 별도로 관리하는 등 연좌제도 적용됐다. ‘빨갱이’로 몰릴까, 피해가 대물림될까 두려워 4.3의 아픔은 오랜 세월 침묵 속에 있어야 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과 남겨진 유족들이 흘린 피와 눈물은 그렇게 소리 없이 묻혀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4.3 진상규명에 대한 작업이 시작되면서 4.3은 점차 수면 위로 올라왔다. 2000년 고 김대중 전대통령은 4.3 특별법을 제정했고, 2003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제주도민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2018년에는 70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추념사를 낭독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탁 트인 풍경, 수많은 색을 지닌 하늘, 흐드러지게 핀 노란 유채꽃. 늘 평화로울 것만 같은 아름다움이 품고 있는 참혹한 아픔도 역사의 한 편으로 기억해야 한다. 동백꽃은 4.3의 영혼들이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갔다는 의미를 담아 4.3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제주에도 ‘진짜 봄’이 오길 바라며, 4월엔 동백꽃을 달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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