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 姓과 性別과 宗中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 姓과 性別과 宗中
  • 이지은 교수 (법학과)
  • 승인 2020.04.13 01:20
  • 호수 12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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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내 누군지 아나? 내가 인마 느그 서장이랑 인마! 어저께도! 같이 밥 묵고! 싸우나도 같이 가고! 마, 다했어!”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감칠맛 나는 대사는 죄를 짓고 잡혀간 반건달(최민식)이 경찰들을 향해 내지르는 一喝이다. 그를 체포한 하급 경찰이 오히려 곤욕을 치르고 반건달은 당당한 모습으로 풀려 나온다. 평소에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여 다진 인맥의 힘이다. 수첩에 빼곡한 전화번호로 기록된 인맥은 적법의 세계에서나 불법의 세계에서나 매우 유용하다. 싸워야 할 때 싸우는 게 건달이라는 조폭 세계의 룰을 충실히 지키는 건달(하정우)과 달리 반건달의 무기는 세관공무원 시절 단련된 눈치와 인맥인데, 그중에서도 경주최씨 종중의 인맥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힘을 발휘한다.

  영화의 영문 제목은 “Nameless Gangster”지만 한국에서는 이름 없는 건달한테도 성과 본은 중요하다. 힘과 분위기, 조직력에서 모두 열세인 반건달이 조폭 두목인 건달의 큰절을 받게 되는 것도 그가 건달보다 위의 항렬이라는 사실, 즉 건달 증조할아버지의 9촌 동생의 손자였기 때문이다. 반건달은 평소에 여러 인맥을 관리하며 특히 최씨 종친회에 공을 들이는데, 종친인 부장검사에게 ‘은혜 잘 갚게 생긴 금두꺼비’를 갖다 주고 구속된 건달을 풀려나게도 한다.

  宗中이란 조상 봉사의 목적으로 공동 선조에서 나온 자손들, 즉 성과 본을 같이하는 자들로 구성되는 종족 단체 또는 혈연단체이다. 대법원은 종중을 “공동 선조의 분묘수호, 제사, 종원 상호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 선조의 후손 중 성년 이상의 남자를 종원으로 하여 구성되는 종족의 자연적 집단”으로 정의해 왔다. 판례에 따르면 항렬이란 혈족 사이의 상하의 세대수를 표시하는 것이며 종중의 주된 목적인 제사는 종손이 담당한다. 종손이란 장자계의 남자손으로서 적장자를 지칭하는 바, 종래 우리의 관습은 상속인들간의 협의와 무관하게 우선적으로 적장자가 제사상속인이 되고 적장자가 없는 경우에는 적손, 중자, 서자, 중손, 서손의 순서로 제사상속인이 된다. 그런데 이토록 정연하고 엄숙한 질서 어디에도 여자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2000년대에 이르자 대법원은 종중 구성원의 자격을 성년 남자만으로 제한하는 종래의 관습법은 더이상 법적 효력이 없다고 선언하였으니, 이것이 한때 “딸들의 반란”이라 이름했던 판결(대법원 2005. 7. 21. 선고 2002다1178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종래 관습에 대한 법적 확신이 약화되었고, 헌법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는 우리의 전체 법질서는 모든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남녀평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으므로 종중의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출생에서 비롯되는 성별만에 의하여 생래적으로 부여하거나 원천적으로 박탈하 는 것은 변화된 우리의 전체 법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결의 이유였다. 

  위 대법원판결에서 지적하였듯이, 혈연으로 맺어진 자들이 모여서 공동의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분묘를 지키며 또한 서로의 친목을 꾀하는 습속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희미해지고 있다.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에 비해 종중의 결속력도 예전과 같은 위세를 유지한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전원합의체 판결의 준엄한 선언이 있었다고 해도 ‘헌법적 규범에 어긋나는’ 모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딸이 종중원이 될 수 있다 해도 종중이 모시는 공동 선조보다 외할머니가 훨씬 가까운 혈연이 아닌가. 결혼한 여자가 되어 제사에 참여(?)해 보면 그 의아한 느낌은 더 짙어진다. 내 아들의 DNA에는 나의 지분이 반인데, 그 아이가 당연히 속하게 되는 혈연 집단에서 며느리인 나는 언제까지나 주변인에 불과하니 말이다. 

  영화에서 조폭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나와 내 또래 여학생들은 골목에 봉고차가 있으면 돌아가거나 뛰어가야 했다. 인신매매 괴담이 극성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전성시대는 필연적으로 반대편의 누군가를 그늘에 밀어 넣는 시대가 아닐까. 영화 속에서 온통 남자들 뿐인 조폭, 검찰, 종중의 세상을 보다 보면, 뜬금없긴 하지만, 그 속에서 기척도 없는 내 어머니 세대와 그들이 고단하게 살아간 시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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