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전 열사 기념비.
박래전 열사 기념비.

 

  우리 대학의 도서관과 미래관 사이 작은 공간에 박래전 열사 기념비가 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그 해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의 기념사에서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를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 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을 말하며 이들 수많은 5월의 영령의 넋을 위로하고,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마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연설했다.

  박래전 열사가 분신하기 전 써 놓은 유서 중에 “87년 6월 투쟁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개량의 환상, 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의 대오를 굳게 하십시오. 아직 할 일이 많은 때 먼저 가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죽어간 많은 사람들은 여러분의 투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또한 “내 무덤을 만들기보다 그대들 내 말을 새겨들을”것을 당부하고 있다.

  1988년 6월 2일 박래전은 광주의 기억과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불살랐다. 1988년은 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항쟁이 이어졌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국회가 만들어졌음에도 광주와 과거 청산을 위한 노력은 지지부진하고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치가 지속되자 이에 항거한 것이다. 열사의 분신 직후 6월 27일 국회에는 5공 비리 특별위원회가 구성됐고, 11월에 1차 청문회가 개최 되었다.

  동아시아는 1945년 일본의 패전을 계기로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각국에서 보통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지만 냉전의 와중에 한국과 중국의 정부는 독재 정권이 장기화됐다. 일본에서는 군국주의자들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55년 체제라는 자민당 정권의 장기 집권을 가져왔다.

  동아시아의 민주화의 선봉에 선 것은 한국의 4.19 혁명이었다. 남북 분단이라는 엄중한 상황이었음에도 부정 선거를 통해 장기 집권 구도를 만들려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 저항의 중심에서 몸으로 맞선 것은 학생들이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자유당 정권의 총 앞에 몸을 던졌다.

  4.19 혁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건국한 신생 독립국이 시민 혁명에 의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 최초의 사례이다. 또한 동아시아 민주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냉전을 강화하는 안보 투쟁이 있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중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 톈안먼 사건이 있었지만 아직도 많은 통제 속에 머물러 있다. 작년에 크게 일어났던 홍콩의 민주화 운동을 한국의 많은 시민들이 응원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확장을 염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어떤 시대이든지 어떤 사회이든지 사람이 사는 곳은 ‘사람이 먼저’라는 인식 속에 모든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연 생태계 역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환경과 미래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 청소년 기후 행동이 정부와 국회가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책임을 다하라는 헌법 소원을 제기하였다. 청소년이 살아야 할 미래에 어른들이 책임을 다하라는 것 역시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최근 문제가 되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기후 환경 문제, 지역 사회의 갈등 및 정치적 문제 등도 이러한 점에 근거한다면 합의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4월 선거에서 여당이 압승을 했다. 시민들의 바람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이 사는 세상, 상식이 통하는 세상. 소수자. 약자를 함께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민중의 요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선거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선자들이 제대로 우리의 바람을 대변하는 지를 검증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진 민주주의를 제대로 진행해 달라는 박래전 열사의 뜻이다. 2016년 촛불 혁명과 2020년 총선의 결과를 제대로 이행하는 자를 끝까지 살피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열사의 기념비를 지나다니면서 마음의 옷깃을 여며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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