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 4월이 지나가고 5월이 다가왔다. 어느새 꽃은 지고 산과 들이 푸른 잎으로 덮이고 있다. 다가오는 5월은 가정의 달이다. 5일은 어린이날이고 8일은 어버이날, 15일은 스승의 날,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5월 한 달은 따뜻한 여름날 속에서 가족과 주변 지인을 돌아보는 달이 될 것이다. 40년 전의 5월도 마땅히 그리되어야 했다.

  1980년 5월을 설명하는 단어로 생명력, 가족, 사랑보다는 희생, 죽음이 더 가까울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신군부는 국회를 봉쇄하고 정치인들을 구속했으며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언론검열을 강화하고 휴교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광주시민들이 강력히 항의하자 신군부 세력은 공수부대 병력을 동원했다. 5월 18일부터 20일 사이에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3공수여단이 차례로 광주 시내에 배치되었다. 광주 시내에 배치된 이들은 소요사태의 진정을 빌미로 삼아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다. 곤봉과 대검을 사용한 폭력으로 인해 수많은 시민이 부상을 입고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21일의 집단 발포는 시민 무장의 기점이 되었다. 21일 오후 1시, 금남로 광장에 최소 10만의 시민이 집결해 있었다. 애국가 방송이 나오자 시민들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집단 발포를 가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분개한 광주시민들은 군경의 무장을 탈취하여 시민군을 조직했다. 광주시민의 저항으로 인해 공수부대는 21일 오후 5시 30분 조선대학으로 집결하였고 이후 광주에서 철수한다. 공수부대가 철수한 22일부터 27일 사이 광주에는 약탈도, 방화도 없었다. 오히려 수준 높은 민주주의 의식과 참여의식을 바탕으로 한 시민자치공동체가 발현되었다. “해방 광주”가 27일 새벽 3시 도청에서의 마지막 저항을 끝으로 막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였던 모습은 한국 사회에 깊게 뿌리 내려 민주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 광주에서의 시민저항은 대한민국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이제 의혹에 쌓인 부분은 사건의 상세한 내막에 대한 것뿐이다. 민주화 이후 있었던 광주특위와 5공특위의 활동들, 그리고 1997년의 대법원판결로 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여러 차례의 검증은 1980년 5월에 있었던 광주에서의 참극이 신군부 세력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위였고, 나아가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의 본질이 국헌문란에 있음을 규명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시민군은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를 마지막으로 방송하고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산화했다. 남은 자의 의무는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광주의 오월은 해마다 빛날 것이며 미래로 가는 등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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