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사고 작용의 기반이다. 인간의 기억체계에 대해서 오늘날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가설은 1960년대 후반에 애트킨슨(Atkinson)과 쉬프린(Shiffrin)에 의해 제시된 다중기억 모형(multistore model of memory)이다. 인간의 심리를 하나의 정보처리 체계로 간주하고, 감각적 정보가 감지 장치에 의해서 단기저장실로 전이되었다가 필요한 것은 다시 장기저장실로 전이되어 영구화한다는 이론이다.

  컴퓨터가 인간의 사고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이 모형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정작 인간의 기억은 하드디스크처럼 특정 구역의 뇌세포에 기록되는 방식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가 어떤 과일을 먹으면서 시고 단 강렬한 맛을 느낌과 동시에 ‘파인애플’이라는 말소리를 들었다고 하자. 이후에 이 어린이가 파인애플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은, 그 ‘느낌’을 만들었던 신경 패턴이 재활성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음상과 결합해 있다면, 곧 어휘 기억의 출발인 셈이다. 기억은 그것을 되살리는 데에 참여하는 신경군과 신경군의 연결, 그리고 연결 과정의 신경전달물질의 전달 패턴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것은 매번 똑같을 수 없다. 신체적, 정신적 상태가 다르고 다른 인지적, 언어적 경험의 누적에 의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어린이의 ‘파인애플’도 이미 다른 과일의 명칭과 함께 유목화되고, 감각적 내용도 날마다 달라진다. 어느 날은 이름만 들어도 침이 고일 수 있지만, 성장한 후의 어느 날은 그저 사업상의 골치 아픈 품목일 수도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이 유지되는 이유는 성상세포에서 분비되는 젖산염이 특정 기억에 참여하는 뉴런과 신경전달 패턴의 재구를 촉발한다는, 스즈키와 같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참고할 수 있다.

  언어신경학의 연구들은, ‘개념’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의미론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의 의미가 [+인간], [+고령], [-여성] 등과 같은 의미 하부 범주의 결합으로 생성된다는 의미자질 이론은, 의미를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성공적이지만 심리적, 신경학적 실체로 보기에는 빈약하다. 그러한 설명은, ‘할아버지’와 관련하여 인식된 세계에 대해 언어적인 풀이로 말할 뿐이다. 추상적이고 고차적인 학술용어라면, 그것과 연결망을 이루는 다른 어휘들과의 상관 속에서 파악된다. 하나의 어휘는 그물망의 그물코와 같아서 다른 그물코로 상대적인 위치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그물코를 분해한다고 해서 그것의 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하나의 어휘는 의미자질로 분해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의미원자론이 주목을 받기도 한다.

  의미기억(어휘기억)은 일화기억과 더불어 장기기억에 해당하는데, 앞에서의 ‘파인애플’처럼 어휘기억의 출발은 일화이다. 그렇게 본다면, 문장도 개념적인 어휘들의 복합에 의해서 비로소 얻어지는 명제나 일화가 아니라, 기존 일화를 기반으로 한 새 일화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언어학에서 순수한 언어능력의 핵심이라고 보았던 구문처리에 대한 신경학적 연구의 결과에서, 구문처리를 할 때 브로카 영역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들의 활성화도 함께 이루어지며, 영역간 연결선들(wires)의 양상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어진 어휘들에 대해 특정 뇌 영역 안에서 연산체계가 가동됨으로써 구문처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언어적 영역들과 함께 전뇌적(whole brain)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브로카 영역의 역할은 순수한 구문연산이 아니라, 전뇌적인 활성화 패턴을 언어구성으로 조율하는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언어신경학적 연구는 자연어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우선 기억은 기록이 아니어서 그것을 저장할 용도의 ‘저장실(store)’도 없다. 개발의 필요나 효율성은 별개로 하고, 만일 인간과 같은 신경처리 방식의 AI를 만들려고 한다면, 디스크의 섹터들이 각 기록을 담는 방식이 아니고, 여러 섹터가 하나의 기억(데이터)을 마련하면서도 각각의 섹터는 또 다른 기억들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같은 입력값으로 매번 다른 결과가 산출되어야 한다. 기존의 관점으로는 ‘오류(error)’에 해당하지만,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또한 언어자료가 문법형태에서 화용의 층위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방대하더라도, 그것의 학습만으로 인간처럼 문법을 구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언어 과정에는 감각, 정서 등이 보조적인 수단 이상의 중요한 원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AI는 다양한 종류의 사물 인식 기능뿐만 아니라 관점이나 정서와도 관련된 다층위 데이터가 언어처리에 효과적으로 협용(協用)되는 체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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