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중순의 어느 저녁, 대학교 1학년생이던 나는 학교 중앙전산원 건물 앞에 서 있었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수강 신청 때문이었다. 그 당시 동시접속이 많은 사이트의 경우 가정용 인터넷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았고, 학점을 잘 주는 인기과목은 수강신청이 시작되고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마감됐다. 그래서 전산실의 통신망을 통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었다. 시험시간에 부정행위를 저지른 학생에게 분노하며 ‘감히 내 수업시간에 이런 행위를 하다니. 자네는 A-네!’라고 하셨다는 어느 전설적인 노교수님의 수업을 나는 꼭 듣고 싶었다. 그럼에도 열 두시간을 한 자리에 서서 기다리긴 쉽지 않은 일.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가방에 넣어둔 책 한권을 펼쳤다. 저자가 월간지에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가볍게 읽기 좋아 보이는 수필집이었다. 불 꺼진 건물 앞 가로등 불빛을 의지해 책장을 넘기며 나는 그 책에 대한 내 첫인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금방 깨달았다. 술술 읽히지만 곱씹게 되는, 그래서 글 한편이 끝날 때마다 다음 글로 쉽게 넘어갈 수 없게 만드는 책이었던 것이다. 어깨에 힘 빼고 자신의 일상을, 삶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글들을 읽으며 그날 밤 나는 여러 번 울고 웃었다. 그렇게 그 책은 내 ‘인생도서’가 되었고 삶의 순간순간마다 좋아하고, 또 고마운 사람들에게 한 부씩 건네곤 한다. 

  얼마 전 학생 한 명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만 스물다섯, 졸업을 앞둔 그가 내 스물다섯에 대해 물었고 나는 무척이나 고민이 많았던 만 스물여섯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어찌 되었든 다 지나가더라고요.” 이 말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 모르겠다. 7년이라는 짧지 않았던 박사유학 시절, 지친 일상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잠긴 채 가끔 부모님과 통화할 때면 아버지께서 늘 내게 해주셨던 말씀이이기도 했다. 면담을 마치고 떠나려는 그에게 책장에 꽂혀있던 ‘그 책’을 뽑아 건넸다. ‘한번 읽어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집입니다.’ 그가 일상에 지친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 책을 펼쳐보길 바란다. 그리고 인생이란 결국 매일매일이 시험이며 그럼에도 그 시험이 “용기의 시험이고, 인내와 사랑의 시험”임을, “어떻게 시험을 보고 얼마만큼의 성적을 내는가는 우리들의 몫”임을 깨닫길 바란다(‘실패 없는 시험’ 중). 

  코로나 사태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 두기 속에서 살아가는 이 때, 기억에 남는 좋았던 책 한 권을 주위 사람에게 건네보는 건 어떨까? 아, ‘그 책’의 제목은 <내 생애 단 한번>, 저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서강대 영문과의 장영희 교수이다.  

  사족: 그날 가장 먼저 전산실에 들어갔던 나는 하필 처음 켠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원하는 과목을 신청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책상 위에 올려놓은 신형 휴대폰도 누군가 훔쳐가 버렸다. 결국 별로 듣고 싶지 않았던 과목들로 수강 신청을 완료했고, 그때 들었던 과목 중 하나가 결국 평생 연구해야 할 방향을 잡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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