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모두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시 ‘꽃’의 마지막 연을 편집해보았다. 눈치 빠른 독자는 앞의 두 문장에서 ‘눈짓’이 ‘꽃’과 맥락화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을 수 있다. ‘눈짓’이든 ‘꽃’이든 그 원래 의미가 무엇일까.

  은유(metaphor)는 문학적 해석의 대상이었다. 학교 교육에서 이루어지는 은유 해석은 롤랑 바르뜨(R. Barthes)의 은유 원리와 맞닿는다. 이 연재의 첫 호에서 소쉬르가 기호를 ‘표시체’와 ‘표시대상’의 결합으로 설명한 것을 소개한 바 있다. 바르뜨는 그 기호가 하나의 표시체로 전환되고 2차적인 의미, 즉 새로운 표시대상을 가리키게 되었을 때를 은유로 설명한다. 문학 수업에서는 ‘보조관념’으로서의 시어가 가리키는 ‘원관념’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일이 주요 과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2차적인 의미는 본래 언어로 명확히 표시될 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굳이 은유를 쓰기보다는 그 명시적인 언어를 채택하는 게 낫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화자의 생각이 매번 고유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언어는 다른 사람과 공유되어야 한다. 그래서 화자는 무의식적 또는 의식적으로 최선을 다해 언어를 채택한다. 작가들이 사용하는 은유는 의식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겠고, 독자는 그것을 해석하려 든다. 문제는 우리들의 생각이 언제나 고유하다는 데에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은유는 일상의 것이다. 여기서 은유는 문학의 문제를 넘어서 언어학의 문제가 된다.

  과거 언어학이나 과학에서 은유는 멀리해야 할 것이었다. 왜냐하면 학문의 기반이 되는 명료한 개념체계를 흔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이 명료하다고 느끼는 것은 익숙한 것에 대한 착각일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철학과 언어학에서 은유가 일상적임을 제기한 사람으로는 레이콥(G. Lakoff)과 래내커(R. Langacker)를 꼽을 수 있다. 레이콥의 주장은 모든 언어의 의미가 은유라고 할 수 있으며, 가장 원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몸과 관련된 단어이므로 그것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래내커는 인지언어학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다. 시공간의 감각적 내용이 의미화된다는 것인데, 그 중심에는 원형심상이 있다. 의미가 원형(prototype)에서 멀어질수록 이해의 난이도가 올라간다.

  예를 들어, ‘앞’이나 ‘뒤’는 신체의 방향을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당신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죠?”라는 문장에서 ‘앞’은 시간의 미래를 뜻한다. 미래(未來)라는 한자어도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공간적 의미로부터 파생된 은유다. ‘흐르다’, ‘지나가다’도 모두 공간적 의미에서 시간적 의미로 변화된다. ‘개념’은 무엇인가를 구분하는 – 범주화하는 - 일인데, 구분하는 능력의 원천은 본래부터의 언어적 과정이 아니라 신체적인 감각과 거기에 따른 인지능력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구분 능력은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에게서조차 먹을 것과 위험한 것을 가리는 것으로 발휘된다. 즉 언어적 구분과 감각적 구분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론이나 과학의 관점에서는 공간이동의 ‘지나가다’와 시간의 ‘지나가다’는 다른 개념의 어휘 항목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 말한 이들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지나가다’의 무수히 많은 의미변화의 연속에서 각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은유적인 언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그것이 문자적인 의미로 파악한 다음 단계를 거쳐 해석하게 된다는 주장과 처음부터 은유 해석 과정이 시작된다는 주장으로 대립된다. 클락과 루시(Clark & Lucy)는 낱말 또는 문장의 사전적인 의미를 파악한 다음, 이를 맥락을 결부지어보고, 그 맥락에 기반해서 추론한다고 가정한다. 그에 비해서 레이콥과 존슨(Lakoff & Johnson)의 생각은,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보이는 단계에서부터 이미 그 자체가 은유적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자적 의미와 은유적 의미가 경계가 없기 때문인데, 그 열린 가능성 속에서 맥락이 의미를 확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객관적인 개념과 정교한 설명이 청자에게 잘 이해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보를 수용하는 일은, 그것이 이전에 청자에게 내면화되어 있던 지식이나 인지 도식과 맞물려야 하는 과정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청자 스스로 완성도를 높인 정보일수록 잘 수용될 뿐만 아니라 장기기억으로 이전된다. 은유는 일상적이다. 여러분이 읽고 있는 신문 기사의 제목도, 그것이 잘 마련된 은유일수록 기자의 관점은 물론 사건의 내용까지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