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 운동이 벌써 40주년을 맞았다. 박정희가 사망한 후 민주주의의 봄을 바랬던 염원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저항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힘에 도전한 대가를 보여주기 위한 장소로 광주를 택했다. 신군부가 최전선의 군대를 빼돌려 진압하고 있음에도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국은 방조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 반미 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는 미국에 의해 컨트롤되었다. 중국을 반공의 방패로 삼으려 했던 미국은 대륙이 공산화되자 일본의 반공 기지로 만들었다. 한반도에서 북진 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부에게는 군사력을 강화시켜 주지는 않았다. 이는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이 다시 전쟁의 수렁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게는 유럽에서 세력을 확산하는 소련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반공을 내세운 독재에 대하여는 묵인하였다. 5.18 민주화 운동과 닮은 꼴인 것이 1948년 4.3사건이었다. 제주 좌파 세력을 중심으로 일어난 4.3무장봉기의 피해를 막기 위해 주둔군 사령관과 무장대장 사이에 평화협약이 맺어졌으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강경 진압을 시도했다. 이는 반공을 무기로 반대 세력을 학살함으로써 공포감을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5.18에서 신군부 학살의 전례가 되었다.

  신군부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김대중의 제거와 신군부에 대한 공포감 조성을 위해 광주가 선택되었다. 광주의 시민들은 총검을 앞세운 군인들 앞에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무장하였다. 이때 광주에서 약탈과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 운동의 순수성을 짐작하게 한다. 신군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보다는 사태를 악화시켜 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구실로 삼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뒤에 5.18의 진실을 밝히라는 투쟁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결국,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민주주의 장을 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5.18은 장기 집권 속에 신음하던 동아시아 각국의 민주화에 영향을 끼쳤다. 장제스의 국민당에 의해 철권 통치되던 타이완도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의 개방 정책에 따라 경제 발전이 진행되자, 1989년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톈안먼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은 경제 붕괴와 함께 1993년 자민당 독주의 55년 체제가 무너졌다.

  물놀이하던 중학생조차 총을 쏘아 죽였던 광주의 진실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신군부의 민정당을 계승한 정당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피해자들이 기념식에서 부르게 해달라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여러 핑계를 대며 부정하였다. 자유한국당은 40여 년이 넘어서 어렵게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에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인물들을 조사위원으로 추천하고, 심지어는 5.18은 북한군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주장에 멍석을 깔아주었다. 진상을 제대로 조사하자는 것은 처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런 비극의 되풀이를 막기 위함이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시하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헌법 전문에는 일제 식민지에서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가 있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업적은 민주주의 발전이다. 이미 전문에 있는 4.19 혁명과 함께 5.18 민주화 운동과 6월 민주 항쟁이 담기는 것은 당연하다. 

  정당은 정권의 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다. 마키아벨리는 목적을 위해 수단의 정당화를 주장했지만, 현대의 정치는 절차적 수단이 비판받는다면 목적 자체가 부정 받는다. 미래통합당이 독설과 망언으로 21대 선거에서 패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정당은 시민의 상식을 넘을 수 없다. 상식에 기반하여 당당한 정책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소명이라는 것을 5월에 새로 구성되는 21대가 국회의원들이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억울하게 희생된 5월 영령을 가슴으로 추모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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