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세상만사<6>



사람은 힘들면 힘들수록 현실도피를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이번 개교기념 특집호를 준비하던 나도 다르지 않다. 아이돌이 보고 싶다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다. 대학교 들어오면 ‘팬질’은 그만둘 줄 알았는데, 어찌 된게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는 ‘팬의 미로’다.


그래도 변화는 생겼다. 나이 때문인지 예전처럼 ‘무섭게’ 좋아하진 않는다. 그냥 앨범 나오면 사고, TV 나온다 하면 볼까 한 번 더 생각하고. 반면 “언니, 그 오빠들이 그렇게 좋아?”라고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보던 어린 나이의 사촌동생들은 이제 그때의 나만한 나이가 됐다. 동방신기, SS501을 쫓아다니는 애들. 그 애들이 노래방을 가서 부르는 노래가사들은 낯간지럽기만 하다.


그래도 가끔은 그런 내 모습이 씁쓸하다. 그 아이들을 보며 괜히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가 더 이상 그 애들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게 제대로 와닿기 때문이다. 그 애들처럼 ‘오빠’와 스캔들 난 여자 연예인을 미워하고 ‘오빠들’의 라이벌은 무조건 깎아내리는 시기는 지났다. 새로 나오는 아이돌은 나보다 더 어리고 마냥 귀엽게만 보인다. 이상한 것은 그 귀여운 아이돌은 사실 우리 ‘오빠들’보다 훨씬 세련된 데도 더 사랑스럽진 않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소식 한 꼭지가 그 이유를 알려줬다. 90년대를 풍미한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의 애니메이션화. 설레는 마음으로 본 티저영상 그리고 한숨. 꽤나 예전부터 나온다는 얘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오랜 시간 후에 보게 된 그것은 딱 90년대라는 말이 주는 어감만큼이나 촌스러웠다. 그 만화책에 나오던 문구 하나 하나라를 다이어리에 정성스럽게 적어내려가던 기억이 선한데 말이다.


그랬다, 추억이었다. 그 만화는 좋아하던 가수의 뮤직비디오, 당시를 풍미한 아이돌그룹들, 지금 보면 간질간질 유치하기만 한 팬픽을 연상시키는 문구들로, 내 유년시절의 모든 기억을 담은 응축물이나 다름없었다. 연습장과 책받침 따위에서 ‘왜 그랬어 오빠’라고 묻고 싶은 어색한 표정과 포즈로 우릴 반기던 오빠들이 그래도 눈부셨던 것처럼, 이 만화는 추억들로 인해 한층 아름다워져 있었다.


애니메이션과 달리 다시 꺼내 본 만화책 <오디션>은 그래서 좋았다. 빛을 발하지 못한 천재소년들이 ‘재활용밴드’라는 이름으로 뭉치고 몇 차례의 심사를 거치는 동안 서서히 그 두각을 드러내며 마침내 최고의 밴드가 된다는 다소 유치할 수도 있는 이야기. 그러나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소년들이 성장하는 만큼, 그 만화에 얽힌 내 추억도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었다. 아, 이 부분이 단행본으로 출간됐을 땐 내가 이랬었지. 아, 이 나이 때 이 부분이 그려졌었군. 오디션을 나와 같은 세대를 보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이 때 넌 뭐했어? 하며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서로 조곤조곤 추억을 풀어낼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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