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삼각형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런데 실은 정삼각형을 본 적이 없다. 오차 때문에 변의 길이와 각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으로는 제대로 그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수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수를 본 적이 없다. 다만 수를 표현한 숫자를 본 적이 있을 뿐이다. 또는 사과가 한 개인 것과 두 개인 것을 구분할 때 수를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사용하고 있지만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 당연히 안다고 생각한다.

  감각적으로나 심상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지만 원리로는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관념이다. 관념은 아주 어렵게 배워야 할 플라톤의 용어라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이다. 예를 들었듯이, 우리는 수를 알고 있고 그것으로 세계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사이버공간과 같은 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정삼각형’이나 ‘하나’가 그러하듯이 그 관념은 언어가 마련해준다. 좀더 친숙한 말로 바꾸면 ‘개념’이다. 언어는 개념의 힘을 기반으로 이성적 사유를 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고대 희랍으로부터 전통이 된 서구 합리주의의 바탕이다. 플라톤의 관념은 언어의 자의성이 마련해주는 것인데, 이를 간파한 듯한 소피스트들은 언어 자체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에서도 명가(名家)가 그러했다.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는 그들과 같은 극단적인 언어유희를 절제하면서 유지되었다. 

  서구 합리주의의 전통은 이렇게 언어가 기반이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문법학이 발달하였다. 예를 들어 인구어의 사격(oblique)이 ‘기울다’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은, 주어를 술어와 대비하여 맞닥뜨리는 줄기로 보아서 오늘날 주격에 해당하는 것을 직격(直格)이라 부르고 나머지 격을 마치 나뭇가지가 난 것처럼 기울어진 격이라 한 데 있다. 이러한 문법학은 수사학으로 이어진다. 당시의 웅변술까지는 아니어도, 유럽이나 미국의 중요한 교육 과정에는 지금까지도 ‘말하기’가 필수적이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말하기를 잘 못한다. 핑계를 대자면, 이전 세대의 분위기가 과묵한 것을 좋아하고 말 잘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이 동양의 전통이기도 했다. 노자는 도(道)를 말하는 순간 이미 도에서 멀어진다고 했다. 사물의 실재를 언어가 가린다고 본 것이다. 노자의 입장에서는 언어가 인위적인 것의 핵심에 속했다. 문명을 만들어주는 언어를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노자가 멀리한 것은 당연하다. 언어에 대한 관점의 동양적 맥락은 불가(佛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전은 물을 건너기 위한 뗏목과도 같아서 물을 건너고 나면 짐만 된다는 것이다. 도가나 불가의 관점은 훗날 실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이 근대적 합리주의를 반성하던 부류의 서구 철학과 이어졌다. 필자에게는 그것조차 종종 말장난으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우주의 순환성이나 무한함, 혹은 다중우주와 같은 현대적인 우주관은 동양의 생각과 맞물리는 점이 있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한 측면은 우리가 생각하던 실재(實在)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서, 사람과 돼지를 구분하는 것은 구성물질의 비율일까? 물론 그것은 아니고 유전정보의 문제이다. 유전학에서 말하는 염기서열이다. 그것은 질료라기보다는 다분히 기호론적인 형식이다. 원리로서의 수가 적용된 결과이며, 자연계의 기호체계인 것이다. 물리학에서도 각 원자의 성질은 그 구성이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전자의 수로 결정된다고 한다. 원자를 핵과 전자로 분해하는 데서 나아가, 그것을 더 쪼개고 쪼개어 결국은 ‘초끈’과도 같이 우리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것들이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결과에 이르고 나면, 우리는 어떤 정합성을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의 ‘헛됨’과 태초에 빛이 있으라던 ‘말씀’의 정합성이다. 물질의 헛됨과 우주 원리로서의 기호에 묘하게 맞닿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도를 깨치지 못한 우리가 진리를 만나기 위해 가진 최고의 도구는 아직까지는 언어로 생각된다. 물론 수도 언어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관어적(關語的)인 정의로써 우리는 정말로 그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일까? 기말시험을 다급하게 준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용어를 중심으로 교과 공부를 하는 일일 것이다. 용어 설명을 듣는 학생이 마치 많은 것을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조금은 걱정이 싹튼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영화 루시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는,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수를 만들었고, 그 수에 갇혀서 그 이상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과 우리를 가두어놓는 것이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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