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로저 브라운(Roger Brown)은 영어를 모국어로 습득하는 아동의 언어발달 과정에 대하여 완성도 높은 연구결과를 제시한 사람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언어발달을 연구하던 브라운은, 1970년대 초 그의 제자들과 수년 동안 세 아이의 언어발달을 추적하고 세밀하게 분석한 결과를 내놓은 일로 유명하다. 아이들은 보통 12개월 정도에서 첫 단어를 말하고 한 단어로 의사를 표현 하다가 18개월쯤 되면 두 단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두 단어 이상은 서로 문법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문법요소도 이때 발화되기 시작한다. 영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언어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현상을 보인다. 브라운에 의하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아이들이 발화하는 첫 문법요소는 ‘-ing’이다. ‘-ing’는 문법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으로 말하자면 ‘진행상’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한국어를 모국어로 습득하는 아이는 문법 형식 중에 무엇을 먼저 배울까? 안타깝게도 잘 모르겠다. 필자의 전문영역이 아니어서이기도 한데, 좀 더 살펴보면, 한국에는 브라운처럼 소수의 아이를 생애의 아주 초기부터 수년간 추적하는 종적 연구를 하는 학자가 거의 없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 대신에 ‘어린이집’ 등에서 각각의 개월 수별로 수십 명의 아이를 상대로 집단 조사하는 횡적 연구들이 많다. 짧은 연구 기간에 상대적으로 쉽게 관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연구자들이 미리 설정한 문법체계에 따라 항목별로 ‘체크’하는 인위적인 면이 있다. 반대로 브라운처럼 아이를 생애 초기부터 수년간 추적하는 종적 연구는 집념을 필요로 한다.

  최근에 숭실대 대학원에서 나온 종적 연구의 결과로는, 한국어의 술어에는 종결어미가 아이에게서 가장 먼저 발화된다고 한다. 문법 개념상 ‘-ing’에 대응한다고 생각되는 ‘-고 있다’는 적어도 초기에 발화될 수 있는 문법형식은 아니다. 그것은 ‘-었-’보다도 훨씬 뒤에 발화 된다. 반대로 미국 아이의 경우에 과거시제 ‘-ed/en’은 ‘-ing’보다 일곱 단계나 뒤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미국 아이는 ‘진행’을 먼저 인식하고, 한국 아이는 ‘과거’를 먼저 인식하도록 하는 다른 인지체계를 가지고 있을까? 물론 아니다. 미국 아이의 “eating corn”이라는 발화를 한국 아이의 말로 옮기면 “(나) 옥수수 먹어”에 해당한다. 여기서 영어의 ‘-ing’는 ‘-고 있다’가 아니라 한국어의 부정형(infinitive form)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상황까지 부정형에 대응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학자들이 설정한 문법개념으로는 두 형식이 비록 같은 문법범주이겠지만, 실제의 운용원리는 서로 다르다. 만일 비교언어학적으로도 일치하는 운용원리를 기준으로 문법범주를 세워야 하는 것이라면, 그런 문법체계는 아직도 개발되지 않았다.

  젊었을 때의 촘스키는 세계 모든 언어에 공통적으로 내재하는 문법, 즉 보편문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밝히는 것이 그를 추종하는 연구자들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래서 세계 언어에 공통된 요소가 있으면 그것이 보편문법의 열쇠라고 생각했고, 이것이 아이들에게는 언어를 습득하기 전부터 마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즉 아이들이 모국어를 배울 때 선천적인 문법 원리를 동원한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아동문법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는 아동문법의 실체가 기존의 언어학에서 다루는 문법형식의 모습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문법학이 아니라, 인지심리학이나 언어신경학의 소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보편문법도 문법학에서 사용하는 형식으로 다룰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린 셈이다. 다만, ‘-ing’나 ‘고 있다’가 그러하듯이, 언어별로 문법형식이 각각의 체계에 자리를 잡아가면서 개별언어에 따른 문법을 형성해 나간다는 ‘사상(寫像 mapping)’의 개념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니까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아이에게는 ‘-ing’ 로 사상되는 문법범주가 발생하는 것이고, 한국 아이들에게는 ‘-고 있다’로 사상되는 문법범주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상된 문법범주들의 구성은 해당 언어의 문법체계를 이룬다. 이러한 설명이 가지고 있는 이면은, 우리가 문법으로 다룰 수 있을 만한 대상은 개별언어에 사상된 이후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비판적인 학자들에게, 이것은 보편문법이 더는 문법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후로 촘스키의 ‘위대한’ 언어학은 정말로 한풀 꺾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쉬르로부터 시작되어 촘스키로 이어지던 현대 언어학은 20세기에 여러 학문에 영감을 주면서 학술 분야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분과학의 시대에서 꽃핀 권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의 언어학은 다른 학문 분야와 빠르게 결속하는 현상을 보인다. 전통적인 협력 분야인 철학이나 문학뿐만 아니라, 앞서 소개한 신경학이나 심리학 또는 전산학에 이르기까지 첨단의 언어학이 존재하는 방식은 주도하거나 이끌려가는 게 아니라, 함께 융해되는 현상을 보인다. 학문의 분과적 체계가 통합적 체계로 바뀌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 소쉬르와 촘스키가 여전히 살아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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