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와 기억
이야기와 기억
  • 오충연 교수 (국어국문학과)
  • 승인 2020.08.10 03:11
  • 호수 1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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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층 건축물의 평면구조를 글이나 말로 설명할 때, 화자가 각 구역을 걸어가면서 탐색하듯이 방향과 위치를 묘사하여 전체를 완성해 나가는 기술 방법이나, 반대로 전체적인 형상을 먼저 말하고 구역별로 위치를 제시하며 세부적인 설명을 해나가는 방법 중에 어느 것이 더 청자에게 건축물의 구조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할까? 후자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수년 전 필자는 공과대학 교수님의 제안으로 공학 글쓰기에 관한 공동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다. 건축물의 평면도와 자동차의 부품인 워터펌프(water pump), 그리고 인체의 소화기관을 각각 시각적 자료 없이 글만으로 설명할 때, 독자가 이런 공간적 대상들을 잘 이해하게 하는 효과적인 기술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실험이었다. 피실험자는 숭실대학교 재학생 수백 명이었다. 건축물의 평면도에 대한 설명은 앞서 말한 대로, 전체 모양을 제시하고 구역별 구성을 설명하는 방식이 좋다. 그런데 워터펌프와 소화기관은 양상이 달랐다. 워터펌프에 대해서는 부속의 모양과 위치를 직접적이고 집중적으로 설명한 글과 역으로 작동과정을 중심으로 기술하되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부속의 모양과 위치를 덧붙여 설명한 글이었다. 결과는 후자의 글에 피실험자들이 본래 목표로 했던 대상(워터펌프)과 일치도가 높은 그림을 그려내었다. 소화기관은 그 정도가 더 높았다. 그리고 그 양상은 인문사회계 학생들보다 이공학계 학생들에게서 더 두드러졌다. 대상의 모양을 글 속에서 숨은그림찾기처럼 찾아내어 퍼즐을 짜 맞추듯이 스스로 재구해야 되었는데, 오히려 완성도와 정확도가 높은 결과를 보인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시간이 지난 후, 기억에 의존해서 다시 글의 언어적인 내용에 대해 답해야 하는 필답시험에서도 같은 양상을 보였다.

  이야기에 대한 기억은 언표적(言表的)인 내용 자체보다는, 머릿속에서 사건이나 장면 등이 일화(episode, 삽화)로 전환되어야 이루어진다. 그런데 빈틈없는 내용으로 잘 구성된 명제의 나열보다, 독자나 청자가 자신의 추론을 통해 내용의 빈틈을 메워 완성한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여기에는 인지도식(schema)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승기는 식목일에 정원 한쪽에 구덩이를 깊게 파서 사과나무를 심었다.”라는 문장을 읽히고 나서 며칠 후에 “승기가 식목일에 사용한 도구는?”이라고 물으면서, ‘굴삭기’, ‘호미’, ‘삽’ 등의 예시를 보여주면 열에 아홉은 ‘삽’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원래의 문장에는 도구가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독자가 스스로 일화를 구성해서 적합한 것을 고른 것인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자기가 상상해서 마련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문장의 연속에서도 “식목일이었다. 승기는 사과나무 묘목과 삽을 양손에 각각 들고 정원 한쪽으로 걸어갔다.”라고 만해도 독자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상황까지 마련된다. 무의식적으로는, 진술된 사건의 앞과 뒤, 원인과 결과까지도 제안되어 있다. 이전에 경험했던 인지적 사례들이 도식화되어, 현재 정보에 대한 해석의 정교화를 유도한 것이다.

  이러한 정교화 추론의 능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날 수 있다. 앞의 워터펌프나 소화기관의 예에서 이공학계 학생들이 결과에 대해서 더욱 편차를 보였던 것은, 공간적 대상을 심상화하는 능력이 더 우수했기 때문인데, 이는 선천적인 소질일 수도 있고 교과 훈련에 의해 발달한 것일 수도 있다. 킨치(Kintsch)는 담화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담화 표상들의 구성은 어휘나 문법 양식 등의 언어형식, 또는 글의 구성, 그리고 상황모형 등의 여러 층위가 작동하는데, 이중 상황모형(situation model)이 훨씬 오래 기억된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개개의 낱말이나 명제 등의 언어 자체보다 통합된 일화(episode)가 장기기억에 이전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화란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이미지화된 장면일 수도 있는데, 전공처럼 추상적이고 고도화된 것일 수도 있다.

  장기보존된 기억, 즉 자기화된 정보는 다시 새로운 정보를 파악하는 데 동원되는데, 새 정보는 구 정보와 통합됨으로써 비로소 ‘이해’가 이루어진다. 스스로 정보의 메꿈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정교하게 한 것일수록 단단하게 결속되어 장기적으로 기억된다.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스스로 새로운 내적 일화를 형성하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읽거나 듣는 이의 인지도식, 그리고 선재(先在)한 고유의 자기 정보에 의해서 수용성이 달라진다. 근래의 교육계에서도 이러한 원리가 주목받기도 한다. 그러나 대학의 전공은 분야별로 고도화되어 있고 교과별로 특화된 측면이 있는 데다, 현실 수업의 환경을 고려하면 이러한 인지적 원리를 통상적인 수준에서 적용한 교수법이 맞지 않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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