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구달(Jane Goodall, 1934~)은 침팬지와 고릴라 등의 유인원을 연구하러 아프리카의 숲속에서 생활하던 영국의 동물학자이다. 그녀는 다른 종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특성을 침팬지와 고릴라에게서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 다른 종을 살해하거나 동료를 다치게 한다. 그런데 영장류가 같은 종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종종 그런 이유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로 힘이 센 개체가 약한 개체에게 뚜렷한 이유 없이 행사하는 폭력의 양상은 집단화가 되어 ‘왕따’ 현상을 보이도 한다. 이 집단폭력은 잠재적으로 힘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은 젊은 개체에게 예방적 차원에서 우두머리가 주도하여 행사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영장류에게도 표시체와 표시대상이 자의적으로 결합하는 기호, 즉 상징을 사용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소 억지스럽게 영장류에게 인간의 단어를 가르쳐서 외우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보다 자연스럽게 어떤 종에게서 상징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별하는 방법은 지역별 행동 양식, 즉 문화가 그 종에 있느냐를 보는 일이다. 문화적 행위는 유전적으로 발현될 수 없고 선대나 이웃의 경험이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교육과 학습에 필요한 상징이 작동해야 한다. 침팬지의 경우에는 아프리카 동부와 서부 해안에서 야자를 까먹는 방식이 다르다. 한쪽에서는 야자나무 위에서 단단한 바위에 야자를 던져서 깨지게 하는 방법을 쓰고 한쪽에서는 돌에 내리치는 방법을 쓴다. 같은 유전 종이 지역에 따라 집단적으로 다른 행동 양상을 갖는다는 것은 학습의 결과이다. 인간의 문화가 그렇다. 언어로 마련되는 문화의 위력은, 다른 영장류가 인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언어는 집단의 영역을 확장하는 특성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속한 단체가 학과든, 학생회든, 동호회든 간에,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서 한 번도 육안으로 감지하지 못하더라도 그 단체의 장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는 자는 종교지도자일 수도 있고 정치지도자일 수도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물의 실존성이 문제가 아니라 학교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는 그 제도이다. 즉 상징 자체가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인간의 집단은 눈에 보이고 살로 부대끼는 범위를 넘어서 형성되는데, 현대에는 그 범위가 인류 전체가 되기도 한다. 이 연재의 첫 회에서 교통신호등의 예를 들었듯이, 상징은 반드시 음성과 뜻의 결합인 언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오만 원짜리 지폐는 그 자체로는 물감 묻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약정된 힘을 발휘하여 그 위상이 전혀 다른 가치를 갖는다. 인간사회에서 이러한 상징의 힘이 부정적으로 작동하면 집단적이면서 대규모의 폭력을 행사하는 직접적 수단이 되거나 물리적 폭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제인 구달은 인간의 문화적 종분화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짓이 번창하도록 한다고 생각했다. 구달은 자기가 가하는 고통을 알면서도 다른 생물에게 의도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정도는 인간이 훨씬 잔인하다고 절망한다.


  다른 영장류에서나 인간에게서 이러한 종류의 폭력은 두려움과도 관련이 깊다. 고릴라들이 약한 고릴라에 대한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행위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발단이다. 전두엽은 고차적인 사고와 앞일에 대한 예측 및 계획에 깊게 관여하는 뇌 영역이며, 두려움을 생성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20세기 전반에는, 극심한 공황발작으로 인해 생활하기 어려운 환자에 대한 치료법으로 전두엽의 일부를 훼손시키는 외과적 시술을 행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부작용도 심각했다. 그만큼 미래를 예측하는 일과 두려움은 맞물린다. 따라서 영장류의 폭력은 생리적 현상으로도 보인다. 인간은 전두엽이 특별히 더 발달한 영장류이다.


  영장류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제인 구달은 동물도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며 품성이 있는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기를 간절히 바란 사람이다. 그녀가 영장류의 또 다른 특성으로부터 인간에게 희망을 거는 까닭이 있었는데, 다른 영장류보다 훨씬 강화된 어떤 특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 설명하기 어려운 ‘희생’을 한다는 것이다. 구달은, 세계 일주 요트 경주에서 앞서 우승을 향하다가 엄청난 폭풍 속에서 구조신호를 보낸 다른 경쟁자에게 주저하지 않고 되돌아간 영국의 피트 고스나, 나치에게 두 자녀와 있을 수 있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폴란드인을 위해 대신 나서서 죽음을 맞이한 성 막시밀리안 콜베,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서 견뎌야 할 고통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를 알면서도 박해자의 손에 목숨을 맡긴 예수를 희생의 예로 든다. 제인 구달은 인간에게서 사랑과 연민과 자기희생의 자질을 부정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것이 그녀의 ‘희망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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