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였을 때, 많은 중국인은 환호성을 올렸다. 중국은 10여 년 전 청일전쟁에서 패한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중국인들의 환호는 호시탐탐 중국을 노리는 러시아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1903년 시베리아 철도를 개통하고, 만주에 동청철도를 놓고 이 지역을 식민지로 하려는 책동을 벌이고 있었다. 자신들이 어찌할 수 없는 러시아를 일본이 대신하여 전쟁을 치른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최석하는 평안도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고 있었던 21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서구의 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정부에 자신도 직접 전쟁에 참가하도록 해달라는 건의를 올렸다. 그는 호시탐탐 남하를 추진하는 러시아를 막는 것이 동양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일본군은 되지 못하였으나 일본군 참모부에 통역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1년도 채 가지 않아 일본의 칼날이 한반도를 비롯해 아시아를 겨누고 있음을 알게 됐다. 최석하는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하자 배신감을 느끼고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 고통받던 많은 동아시아인은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던 일본을 배우기 위해 도쿄에 몰려 들었다. 중국의 쑨원은 도쿄에서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여 청의 타도를 준비하였다. 베트남은 동유운동을 통하여 일본의 신학문과 사상을 배우고자 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도 일본 유학을 통해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한 동아시아의 학습욕에 대하여 일본이 이후 전개한 것은 침략전쟁이었다.

러일전쟁 개전 초인 1904년 4월 프랑스 잡지인 'Le Petit Parisien'에 실린 사진. 중국은 장막 뒤에서 보고 있다.
러일전쟁 개전 초인 1904년 4월 프랑스 잡지인 'Le Petit Parisien'에 실린 사진. 중국은 장막 뒤에서 보고 있다.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하 정책을 취한 19세기 중엽 이후 일본 역시 러시아에 대해 위협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러시아가 만주를 차지하고 세력을 한반도로 확대하려 하자 일본에서는 두 개의 러시아 대책이 있었다. 러시아에 만주를 주고 한반도를 일본이 갖자는 만한교환론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일동맹을 통해 러시아와 맞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만한교환론이 실패하자 1902년 영일동맹을 맺어 러일전쟁 준비를 진행하였다.

  일본 해군이 인천과 뤼순의 러시아 함대에 공격을 가하며 전쟁은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확장에 불안을 느끼던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은 일본 전체 전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전쟁 차관을 일본에 지원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대외 중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군대를 앞세운 일본은 한국 정부에 일본 지원을 약속하는 협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일본군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한국을 대러 전쟁을 위한 군사기지로 삼았다.

  러일전쟁의 주전장이었던 만주는 인구가 조밀한 지역으로 수많은 생명이 전쟁의 참화 속에 휩쓸렸다. 당시 잡지에 따르면 중립국인 중국인의 사망자는 수십만 명으로 전쟁 당사자들이었던 러·일의 군인보다 많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러·일 양군의 전쟁으로 집을 잃고 떠돌았으며, 이들에 의해 강제로 전쟁 노역에 동원당했다. 일본이 러시아와 싸운다고 했을 때 질렀던 환호성은 고통의 단말마로 변해갔다.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지역은 일본으로 넘어갔고, 일본은 이 지역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통해 반식민지 상태로 지배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1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는 청일전쟁 때보다 4배를 훨씬 넘는 것이었으며, 사망자 수도 청일전쟁의 6배에 달하는 8만 1,000명이나 되었다.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러일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서막에 불과했으며, 일본 스스로도 더 큰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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