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제국
학문의 제국
  • 오충연 교수 (국어국문학과)
  • 승인 2020.09.22 20:52
  • 호수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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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알려진 바와 같이, 현대언어학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 그의 생성문법은 1950년대 후반 이후 21세기 초까지도 이론언어학을 장악하였다. ‘촘스키 언어학’은 미국 외의 국가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도 촘스키 언어학을 다루지 않고서는 언어학에 접근하기 어려웠다.

 미국에서는 그가 특강을 할 때마다 학생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구름처럼 몰려들어 인파를 이루는, 그야말로 대석학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수강자를 끌어모으던 기제는 정작 언어학보다는 사회학적인 문제였다. 촘스키는 미국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며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핵심은 신자유주의였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은, 무방비 상태의 자유무역으로는 자본이 약한 국가의 경제를 강한 국가가 점령하게 된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결국 패권적인 자유무역의 양태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촘스키에게 신자유주의는 유럽인이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에 걸쳐서 전세계를 식민지로 정복하여 제국주의를 구축한 역사의 맥락으로 파악되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열강의 세계 정복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서도 ‘실패한 국가(Failed States)’로 묘사할 만큼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고 맹렬히 비판했는데, 최근의 코로나19 감염병에 대해서도 한국이나 뉴질랜드 등의 나라에 비해서 미국이 부적절하게 대처하고 있는 원인도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문제의 원인은 보편적인 보건과 같이 자국민을 위한 체제를 개발하지 못한 데에 있는데, 외부에 핑계를 댈 희생양을 찾는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석유가 원인이 되어 벌어지는 중동의 문제부터 한국이 포함된 동아시아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계 정세에 폭넓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과정에도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의 제자이자 언어학자인 장영준 교수와의 대담에서는,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에 IMF가 취한 고금리 정책에 대해 지적하면서 구제금융을 받은 것은 한국이 아니라 국제 투자가들이라는 날 선 비판을 하기도 한다. 가혹한 구조 조정 프로그램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은행과 투자가들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을 한국민이 떠안고 있다는 것이다. 근래에 뉴스에서 볼 수 있는 FTA(Free Trade Agreement)도 신자유주의의 맥락에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FTA는 양자간 협약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각각의 주체별로 조건이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한국이 여러 주체와 맺는 FTA의 내용은 각 시기별 정부가 다양한 변수로 협약을 맺고 있으니, 이 분야에 전공이 아닌 필자로서는 현실적인 내용을 평가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촘스키의 언어학은, 본의가 아닌 듯싶게 가히 학문적인 제국을 형성했었다. 필자의 대학원 시절에는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이론의 업데이트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겠다는 열패감을 주기도 했다. 촘스키가 그토록 오랜 시간 학문의 제국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는 자기가 고안한 생각에 마무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아이디어를 열어놓고 다른 학자들이 얼마든지 참여하여 이론을 계속 발전시키게 한 것이다. 일종의 집단지성과도 같았다. 어떤 경우에는 그의 아이디어를 추종하던 연구자들이 무색하게 아예 전환적인 생각을 꺼내기도 했다. 80~90년대에 언어학에 있어서 한국은 촘스키의 이론이 절대 강세였다. 그만큼 주변의 나라에 비해서 유달리 빠져든 나라가 한국이었다. 유럽은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문법학이 강세였고, 가까운 일본의 학문적 성향은 관념적인 생성문법보다는 다소 감각적인 인지문법에 더 비중을 두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자국의 문법학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시절이어서 국제화된 담론에 참여하던 때가 아니었고, 다만 미국의 중국계 학자들이 활동했다. 그렇게 한국의 언어학은 촘스키 언어학과 단단히 결속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좀 솔직히 말하면, 촘스키 이론의 ‘정통’이라고 할 만한 담론들은 재미가 없기도 했고, 한편으로 촘스키는 구름 위에서 또 다른 산맥을 가리키려는 듯한데 추종자들은 골짜기를 파헤치고 있는 느낌도 있었다. 실은 이들이 다수라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그를 중심으로 변형되거나 반박하며 파생되는 이론이 많았다.

 근래의 진보적인 몇몇 학자들은 촘스키 언어학을 업그레이드하는 차원이 아니라, 중요하고도 다른 관점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정면으로 촘스키를 비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것은 위대한 선학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지만, 치열한 논쟁을 할 만한 ‘촘스키 울타리’ 내의 담론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의 언어학은 그러한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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