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서산의 해미읍성
단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서산의 해미읍성

 코로나바이러스가 점점 소멸하여 물러갈 것 같았던 지난 6월 중순, 여러가지 면에서 취향이 맞는 의사 친구와 충청남도 지역을 여행했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인술(仁術)을 베풀던 친구가 서울에서의 의사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낙향(落鄕)한다고 했을 때, 내심 걱정이 앞섰다. 많은 의사들이 서울로 올라와 개원(開院)하려고 하는데, 고향이기는 하지만 서울이 아닌 곳으로 내려간다는 사실에 선뜻 동의해 주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방에도 양질의 의료진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결국에는 친구의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나로서는 아쉽지만 지방에도 많은 의사가 필요한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고 생각해본다.

 쉽지 않은 결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대의(大義)다. 사람이 큰 뜻을 세우면 ‘큰 실행’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친구가 지방으로 내려가면 서울에 있을 때보다는 만날 수 있는 빈도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라도 같이 가기로 했다. 일종의 ‘송별 여행’이었는데, 행선지는 충청도 지역으로 정했다. 친구가 국내 여행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사실 나는 국내 여행에는 문외한이다. 유럽 지도를 A4용지에 그리고 주요한 도시의 위치를 찍어 보라고 하면 실제 지도와 거의 다르지 않게 위치 선정을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지도 위에 대한민국에 있는 도시들을 명기해보라고 하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예컨대, 독일의 함부르크와 베를린, 폴란드의 바르샤바, 심지어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의 위치를 찍으라고 하면 꽤 정확하게 위치를 표시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 지도에 영월, 상주, 봉화, 진주, 군산, 김제, 진도의 위치를 표시해보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많이 창피한 일이다. 국내 여행을 해외 여행만큼 많이 해보지 않은 탓이다. 많이 해보지 않았다기보다는 국내 여행이 해외 여행 만큼 큰 매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국내 여행을 해 본 사람이면 이구동성으로 “국내에도 좋은 데가 너무 많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한 번의 구호로 끝나고 새로운 국내 여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다. 해외로 눈을 돌리고, 외국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큰 비용을 지출하는 사람은 많지만, 국내의 여행비용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비싸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정부의 효율적인 국내 여행 정책의 부재(不在)와 ‘한철 돈을 벌어보자는’ 얄팍한 상술이 결합되어 탄생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그 정도의 돈이면 동남아에 가는 게 낫다’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친구와 내가 충청도 중에서도 충청남도 지역을 여행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여정의 첫 번째 장소는 서산(瑞山)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와본 도시 서산이 독일의 바덴바덴보다 낯설다. 친구가 이번 여정의 가이드로서 나에게 소개한 서산의 첫 번째 장소는 해미읍성(海美邑城)이었다. 이 성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석성(石城)이었는데, 1973년 이전까지는 폐허가 되어 성안에 민가도 세워지고 학교까지 있었지만 대대적인 복원사업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성이 있었을 줄이야. 이순신 장군이 해미읍성에서 10 개월간 근무했다는 설명에 알지 모를 감동까지 몰려 왔다. 입장료와 주차료까지 무료라는 사실만으로도 국내 여행은 어디를 가도 돈을 내야 한다는 나의 선입관이 무너져 내렸다. 편견이란 모든 활동을 중단시키는 원흉이다. 조선시대 관아(官衙)의 모습이 가뜩이나 멋진데, 70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이 직접 만들어 온 방패연을 성의 입구에서 날리고 있었다. 해미읍성의 단아함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서산에서 두 번째로 간 곳은 간월암(看月庵)이었다. 조선의 건국에 깊이 관여한 무학대사가 무학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폐사되었고, 1914년에 다시 중건되어 간월암으로 재탄생되었다고 한다. 서해바다의 작은 섬 위에 지어진 아담한 절의 자태가 프랑스의 몽생미셸(Mont Saint-Michel)의 규모와 견줄 바는 아니겠지만, 그 신비로운 모습은 절대로 뒤쳐 보이지 않았다.

 해미읍성과 간월암을 둘러보고 나니 국내여행을 더 많이 다녀야겠다는 다짐이 샘솟는다. 다짐이 다짐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번의 다짐은 코로나 시대와 맞물려 꽤 오래 갈 것 같다. 해미읍성과 간월암이 만들어내는 ‘미장센(Mise en scene)’은 나에게 새로운 국내 여행의 시대를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충청도 여행 한 번 해놓고 너무 현학적인 표현을 쓴 것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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