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훈민정음
  • 오충연 교수 (국어국문학과)
  • 승인 2020.09.28 14:13
  • 호수 12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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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에 숭실대학교에서 한 외부인사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한글을 세종이 만들었다고 볼 수 없고 오랫동안 민간에 전해지면서 형성되었던 것이라는 다소 이념화된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강단의 뒤에 앉아 있던 필자에게는 그것이 난감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물론 그는 국어학자가 아니었다. 한글, 즉 훈민정음은 세종이 만들었다. 

  같은 표음문자인 로마자는 그야말로 수백에서 수천 년간 사람들과 지역 간의 쓰임새에 따라서 변화되어 온 글자이다. 그래서 유럽의 나라마다 읽는 방식에 차이가 나고, 같은 문자라도 단어에 따라 다른 소리로 읽기도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해당 글자를 발음할 때 발음기관의 모양을 옮겨서 만들었다는 제자원리까지 설명되어 있다. 예컨대 ‘ㄱ’은 혀 뒤쪽이 굽은 모양새를 형상한 것이다. 훈민정음은 제자원리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소리를 명료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는 일정한 기간에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은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다. 훈민정음이 하나의 음절에 대하여 세 개의 음으로 파악한 것은 중국 운학에 비해 획기적인 일이었다. 중국의 운학(韻學)은 성모와 운모, 즉 한 음절을 두 개의 소리가 조합된 것으로 파악하고 여기에 성조를 얹는다는 체계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받침’이라고 일컫는 마지막 자음은 운모인 모음의 끝을 맺는 방식, 즉 운미로 인식했을 뿐이다. 실제로 ‘밥’의 첫소리 ‘ㅂ’과 끝소리 ‘ㅂ’은 각각 터져나오거나 그렇지 못한 소리로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세종이 하나의 음절을 셋으로 파악하게 된 이유는, 끝소리가 비록 첫소리와 같게 실현되지 않더라도 그 입모양이 같았고, 다시 모음을 이으면 소리도 같아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끝소리를 모음의 끄트머리로만 인식했던 중국의 운학에 비해서 독자적인 음소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근래에는 아예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보다는 세종의 역할을 훨씬 높게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세상에 음소와의 일치도가 이렇게 높은 실용문자는 없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로 인한 단점이 있다. 책을 속으로 읽는 속도의 면에서는 영어와 같은 로마자 언어에 비해 약간 느리다는 점이다. 독자가 책을 읽는 속도는 말을 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그 차이는 훈련이 잘 된 독자일수록 크다. 이는 표음문자라 하더라도 그것을 소리로 옮긴 다음 그 소리를 통해 단어를 파악하는 인식 경로를 사용하지 않고 문자가 뭉쳐진 단어의 전체의 모양새, 즉 시각적 정보를 소리 변환 없이 바로 의미로 파악하는 직접적인 인지 경로를 사용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즉 한글은 소리와의 높은 일치도로 인해 소리로 변환하는 경로를 사용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더 높다. 그에 비해서 영문의 경우에는 하나의 문자가 한 가지 음소로만 대응하지 않는 바람에 단어의 시각적 정보를 그대로 의미로 변환하는 직접 경로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사용한다. 글자 하나가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자, 즉 표어문자인 한자는 그 정도가 더 크다. 그래서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읽을 경우에 한자로 된 것에 대한 파악이 더 빠를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다. 물론 독서 속도는 개인의 숙련도가 훨씬 결정적이어서, 이러한 현상이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미미하기는 하다.

  세종이 훈민정음 반포를 강행했던 이유는 물론 그의 애민정신 때문이겠지만, 그의 기저 성품인 학구열과 실용주의가 바탕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여건은 선왕 태종에 의해 강화된 왕권이 마련해주었다. 사대부들이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했던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된다. 우선 학문이란 무릇 좀더 어렵고 고상한 사유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데, 생각을 담지 않고 소리만 담는 정음은 사대부의 체통에 걸맞은 게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문자를 익히는 행위 자체가 고도의 철학적이고도 학술적인 사상을 아는 일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학문이 아닌 문자는 필요 없었다. 게다가 상민들조차 쉽게 익힐 수 있는 여지가 많아서, 정음을 다들 사용하게 된다면 상민과 양반의 신분질서를 어지럽힐 것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상민은 집문서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사대부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훈민정음이 실제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왜란 때 ‘백성’들은 양반의 무능을 목도했으며,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왜란 이후에는 민중의 생각이 실용적으로 변하고 과학기술의 필요성이 사상적 맥락을 주도했다. 또한 춘향전이나 토끼전 같은 한글문학이 성행하고, 저잣거리나 규방에서 사람을 모아놓고 이를 읽어주는 전기수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문자의 평등은 정보의 평등으로, 그리고 인간의 평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문맹률이 가장 낮고, 정보화가 가장 진척된 나라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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