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82.7세로 나타났다. 80년이라는 긴 시간의 기억을 풀어내면 누구라도 그 안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어떤 이야기는 오직 자신만이 경험한 특수한 것이겠지만, 비슷한 시대를 건너온 사람들이 공유한 집단적인 기억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한 세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세대 구성원들이 어떤 시기를 거쳤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경험을 공유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192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의 경우 그들의 삶이 한국의 현대사를 그대로 관통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일제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자랐고, 청년 시절에 해방과 정부수립,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었다. 전후 폐허가 가시지 않은 시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4.19혁명이나 5.16 군사 정변 같은 정치적 사건도 겪었으나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평균적인 삶의 질 향상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은퇴 후 노년의 한 지점에는 서울올림픽과 OECD 가입이라는 축제가 있었지만 머지않은 다른 지점에는 그들의 자식 세대를 덮친 IMF 경제 위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세대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이러한 일들을 겪어나가는 동안 그들 중 누군가는 이러한 경험이 그가 살아가는 시간 및 공간과 맞물리는 모습을 통찰하고 그것을 때로는 역사서의 형태로, 때로는 자서전의 형태로 기록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그 형식의 측면에서 개인의 삶과 역사가 마주하는 장면들을 조금은 덜 딱딱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한 세대와 그들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1920년에 평안북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한 사내는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1944년 일제의 학병으로 징집되었으나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 광복군에 합류한다. 해방 이후 고려대 사학과 교수가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 하에서 수차례 당 사무총장이나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모두 거절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중 1982년 고려대 총장을 맡게 된다. 그러나 데모에 가담한 학생들을 제적하라는 정권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 결국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총장직에서 사퇴하게 된다. 다시 몇 년이 지나고 16년 만의 직선제로 들어선 정부는 그에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직을 제안하지만, 그는 이 역시 거절한다. 이러한 결정은 평생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신념을 따른 것 이기도 하지만, 그가 살아가는 역사에 대한 책임과 사명의 실천이기도 했다. 자신이 총장을 사퇴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동시에 자신이 총장에서 강제로 물러나는 것을 막으려 한 제자들이 여전히 감옥에 남아있는 상황에서 총리를 맡는 것은 “젊은 층에게 큰 실망” 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군정 종식과 5공화국과의 단절”이 중요한 시기에 자신을 “새 정부의 정신적 도덕적 정통성”을 위한 간판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알기에 이에 응할 수 없었다. 그의 일갈은 당시 적지 않은 힘을 지녔던, 전직 대통령이며 국정자문회의의 의장이었던 이를 향한다. “군사 독재자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국정보고를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나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내가 독재자 앞에서 국정보고를 하는 장면을 신문이나 TV로 보는 양식 있는 국민들에게 커다란 실망과 좌절감을 느끼게 할 문제임이 틀림없다” 총리직 고사 이후 23년의 여생을 그는 학문발전에 썼고 역사의 고비마다 더 나은 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사람들과 나누며 보냈다. 그 사이 그는 자신이 건너온 시대와 삶을 다섯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그의 이름은 김준엽이고 그가 쓴 자서전의 제목은 <김준엽 현대사-장정(長征)>이다.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 충칭으로 건너갔던 그 과정이 장정이었고,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그 삶 역시 장정이었다. 오늘날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보이는 내로남불 행태에 젊은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고 또 비판한다. 이에 대해 그저 젊은이들의 개인주의적 태도가 심각해졌다거나 우경화되었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태도는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갈등을 더욱 키우기만 할 것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늘 미래세대의 가치를 고려하고 그들의 가능성을 키워주는 것이 진정한 어른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는 적어도 젊은이들의 눈에 그러한 어른들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준엽 선생이 더 그리워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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