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27일 중앙청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해병대원.자료: 이데일리
1950년 9월 27일 중앙청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해병대원.

  1950년 9월 27일 중앙청 건물에 태극기가 다시 올라 갔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에서 서울을 빼앗긴 지 석 달 만에 다시 찾았던 것이다. 전쟁의 시작은 북한군이 차지하였다. 그들은 전쟁 개시 3일 만에 서 울을 점령했다. 너무 빠른 점령에 그들도 놀라 며칠 동안 여유를 잡았다. 전사 전문가들은 여세를 몰아 북한군이 남하를 신속히 하였더라면 아마 전쟁의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 한다.

  6.25 전쟁 전 한반도 상황은 남북의 집권자 모두 무력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북한을 민주 기지로 만들어 남한을 전쟁을 통해서라도 해방시킬 것을 주장 하였다.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조속히 전개할 것을 강조 하였다. 말뿐인 이승만과 달리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오가며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차지한 것은 북한 정권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에 무기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관심은 동유럽에서 소련 세력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두 곳에서 모두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1950년 1월 미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였다. 이는 북한이 남침을 하더라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그널을 제공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판단과 달리 유엔 안보리에 당일 이 문제를 회부하였고, 안보리는 결의문 82호를 통해 북한의 철수를 요청했다. 반응이 없자 6월 27일 83호를 통해 유엔군을 파병하기로 하였다. 이후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병하였다. 미군의 파병은 6월 27일에 이루어졌다.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북진을 전개하였다.

  6.25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였다. 미국이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하자 중국이 반발하였다. 또한 유엔군과 국군이 38도 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계속하자 중국은 동북 지방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 시켰다. 중국은 10월 25일 ‘미국에 저항하는 조선을 도와 가족과 국가를 지키자’며 참전을 결정하였다. 중국군의 참전으로 연합군이 밀려 다시 서울을 빼앗기는 일도 일어났다.

  1.4 후퇴 이후 38선을 중심으로 두 진영의 군대가 일진 일퇴를 거듭하는 사이 정전 협상이 진행되었다. 양 진영 모두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경계함과 동시에 과다한 전비 사용을 우려했던 것이다. 1953년 7 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고 군대를 확대하며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게 했다. 이런 대치 상황을 이용하여 남북의 통치자들은 적대적 감정과 상대의 위협을 과장하며 독재 권력을 강화하였다.

  중국은 한국 전쟁 참여를 통해 내부 결속은 공고하게 할 수 있었지만, 자본주의 진영의 경제 제재 등으로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반면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소련에 비해 믿을만한 친구라는 신뢰를 쌓기도 하였다. 전쟁 중 미국은 일본을 반공 기지로 삼기 위해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전보장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국, 타이완과는 상호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 동맹이 형성되어 냉전의 중심축이 되었다. 한국 전쟁이 만들어 놓은 동아시아 대립은 휴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바꾸고, 군비 경쟁에서 벗어나 상호 신뢰와 번영을 위한 협력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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