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 가정에는 모순이 있다. 배경으로 설정한 세상은 이미 나 이외의 것이기 때문이다. 말장난은 삼가고 계속해보자. 오로지 나, 즉 주체만 있다면 나는 나를 인식할 수 있을까?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것을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우리의 감각은 이 세계를 인식하는 데 쓰인다. 내 밖의 세계가 없다면 감각이 발생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지적 내용도 없다. 우리의 살갗과 시각을 통해 발생하는 감각 자체도 세계와의 소통에 쓰이는 것이지, 그 자체로 주체는 아니다.

  라캉(Jacques Lacoan)은 이렇게 주체를 인식하게끔 해주는 이 세계를 거울로 비유한다. 자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형성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니라 거울이다. 자아는 거울의 다른 이름인 타자와의 소통에 의해 마련된 방식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면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나 이외의 것과 관계되기 전의 본성적 주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참된 주체는 인식될 수 없고, 말하여질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은, 음소의 가치가 고유한 음성 특성으로부터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음소와 구별될 수 있는 변별성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소쉬르의 설명과 닮아있기는 하다. 라캉은 사물과의 소통을 인간의 상징, 즉 언어로 고도화한다. 언어는 거울이다. 인간은 타자와의 소통 속에서 수용된 문화적 상징들을 자아로 인식하고 자아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지만, 본래의 욕구적 본성을 알 수 없으므로 실패한다는 게 라캉의 얘기이다. 

  유럽에서 이렇게 시작되는 담론은 처음에는 비유인 듯 아닌 듯, 적절해 보였던 진술이 논의를 거듭하면서 사변적인 논쟁들로 이어지는 듯하다. 이들은 물질과 공허(空虛)를 넘나드는 현대 물리학의 개념들까지 끌어들여 담론의 꽃을 피웠다. 결국 건조한 실증주의자들이나 과학자들에게 신랄하게 비판을 받기 시작한다. 소컬(Alan Socal)은 미국의 물리학자로 뉴욕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데, 자신이 문학이나 철학에 대해 별다른 소양이 없다고 한다. 그는 유럽의 난해한 담론을 참고 지내기 어려웠던지, 어느 날 ‘양자 중력’을 제목에 넣어서 유명한 포스트모던 계열 학술지인 <Social Text>에 투고하여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출간하기에 이른다. 내용은 자신도 이해가 안 되는 담론에 동조하면서 양자역학의 용어들을 엉터리로 짜깁어 넣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그의 유명한 책 <지적 사기Impostures intellectuelles>를 출간한 근거가 되었다. 책의 내용은 유럽의 담론들이 과학을 막연하게 오용하면서, 알고 보면 무의미한 구절과 문장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도 학자답지 않은 강한 어조로 주창한다는 것이다. 학술지 편집진의 뒷얘기로는, 부족하지만 물리학자의 견해로서 실을 만하다고 인정하여 게재하기로 결정했었다는 볼멘 해명도 있다.

  비유적인 담론보다는 –실은 필자가 지난 세기 후반의 골치 아픈 유럽의 담론을 깊이 있게 소개할 능력은 없으므로- 라캉을 떠올리게 하는 신경의학의 논의를 소개해보는 것이 좋겠다. 노벨상을 받은 바 있는 에델만(Gerald M. Edelman)은 일차의식만을 가진 보통의 동물류와는 달리,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를 이차의식이 있는 동물들로 분류한다. 이들은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이 발달한 종들로서 어의적 능력이 있다. 보통의 동물들에게 사유가 발생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심장이 뛰거나 호흡하는 체계, 즉 체내 항상성 체계는 원형적인 주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율신경계로서 곧 의식은 아니다. 감각기관에 의해 나 이외의 것, 즉 외계와 접촉하면서 즐겁거나 괴로운 긍정, 부정의 지각을 겪고 사물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게 된다. 동물에게 사물들은 그 가치에 따라 범주화된다. 이렇게 가치 범주화된 체계는 다음의 경험을 맞이하게 될 자신, 즉 주체의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탱자와 같은 가시나무로부터 상처를 입은 놈은, 상처를 입은 기억으로부터 같은 모양새로 유목화된 식물들을 판단하고 회피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감각적 경로를 통한 순환 및 재유입 체계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일차의식이다. 일차의식만을 가진 동물들도 물론 기억을 하며 기억의 한도 내에서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에 대한 개념은 없고,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기호로 표현할 만한 ‘자아’가 없다. 그에 비해, 이차의식은 브로카와 베르니케 영역이 감각의 순환적 재유입 체계에 개입함으로써 발생하는데, 이런 의식체계를 가진 동물들은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현재가 아닌 시간대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기호를 사용한다. 이들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인식할 줄 알고 다른 개체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추론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다른 영장류에게는 없는 구문론적 능력, 즉 의미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사상을 창출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도 밖의 것들과 소통하면서 가치의 범주 체계를 이룬다. 스스로에게 주체로 인식되는 것, 즉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지만 고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누구나가 각각 다른 경험과 소통을 해왔기 때문이다. 타자로부터 마련된 자아는 다시 타자와 소통을 한다. 따라서 소통은 내 밖의 것을 나의 요소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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