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호수, 마을과 민화 제천
산과 호수, 마을과 민화 제천
  • 정희섭 교수 (글로벌통상학과)
  • 승인 2020.11.17 18:32
  • 호수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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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외벽이 민화로 채워져 있는 제천 교동민화마을.
마을의 외벽이 민화로 채워져 있는 제천 교동민화마을.

 

  1985년에 완공된 충주댐은 아름다운 인공호수를 만들어냈다. 충주와 제천, 그리고 단양에 걸쳐져 있는 꽤 커다란 호수를 충주 사람들은 충주호라 칭하고 제천 사람들은 청풍호(淸風湖)라 부른다. 그런데 충주호보다는 청풍호가 더 낭만적으로 들린다. 공식적인 명칭은 댐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충주호지만, 청풍호라고 하면 어디선가 신선한 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느낌이다. 청풍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는 댐 건설 당시에 가장 많이 수몰된 지역이 제천시 청풍면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설득력이 있는 이유다. 예컨대, 지하철 숭실대입구역이 살피재역으로도 불리는 이유와 흡사하다. 충주호와 청풍호가 같은 호수라는 것을 지난 9월에 취재를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됐다.

  청풍면에 있던 각종 문화재는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되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선사시대의 고인돌까지 전시되어 있다. 댐이 지어질 당시의 상황을 나는 전혀 모르지만 추측컨대, 경제성을 최우선시하여 한 도시가 수몰되는 것을 용인(容認)했을 것이다. 얕은 생각이지만 앞으로는 이런 인위적인 개발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청풍호가 만들어 준 멋진 풍광(風光)이 관광객들에게 한없이 고마운 존재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얻으면서 잃고, 잃으면서 얻는다. 호수 주변의 리조트와 호수 위의 유람선은 ‘얻은 것’이지만 물에 잠긴 누군가의 고향은 ‘잃은 것’이다. 여행 중에 잃은 것과 얻은 것을 잘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여행일 것이다.

  제천의 월악산(月岳山)은 강원도에 있는 설악산(雪嶽山), 치악산(雉嶽山)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악산’ 으로 꼽힌다. 한자는 다르지만 악(岳)자나 악(嶽)자가 산 이름에 들어가면 기암괴석이 많고 험준한 것이 보통이다. 월악산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해발 1,097미터를 자랑하는 영봉(靈峰)은 아무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정상이 아니다. 단풍이 절정을 찍고 서서히 나무로부터 이탈해나가는 요즈음 월악산은 첫눈으로 설경(雪景)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제천 최고의 명소로 나는 월악산을 꼽는다.

  제천에 와서 의림지(義林池)를 보지 않으면 냉면 전문집에 가서 갈비탕을 먹고 오는 기분이지 않을까.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다. 의림지 주변에 조성된 여러 종류의 나무들은 사시사철 옷을 갈아입고, 그 아름다움을 담으려는 사진 애호가들로 늘 북적인다. 여행 중에 펼쳐지는 풍경은 눈으로만 담아도 충분하다는 나의 생각을 의림지는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카메라 배터리가 다 소모될 때까지 셔터를 눌렀다. 아름다운 장소는 인간의 신념을 순식간에 변화시키는 마력을 지녔나 보다. 내가 가진 신념은 늘 여행 중에 붕괴되어 없어져 버린다.

  각 도시의 관광 포인트가 자연 그 자체이건 인위적으로 조성되었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다. 재미가 없다면 여행은 무미건조해질 것이고 여행자는 쉽게 지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교동민화 마을’을 추천한다. 집의 외벽이 온통 민화로 채워져 있는 작은 마을이다.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서당에서 회초리를 맞는 아이, 과거에 급제해 어사화를 쓰고 행진하는 선비, 소를 몰며 쟁기질하는 농부가 벽에서 되살아나는 아기자기한 마을이기도 하다. 꽃과 나비의 향연, 낭자와 도령의 순애보,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누군가의 붓으로 그럴 듯하게 묘사되어 있다.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을 비교하는 건 두 번째 문제이고 마을이 민화로 가득차면서 활기를 얻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였다. 다음번에 또 오게 되면 그 때는 마을의 공방에서 민화 그리는 법을 배울 것이다.

  취재와 여행이 다른 것은 딱 하나다. 생각을 하느냐 마느냐. 취재는 정해진 여정을 돌면서 늘 생각을 해야 한다. 육하원칙에 맞게 언제 어디서 내가 무엇을 보고 먹고 마시고 행했는지를 잘 적어야 하는게 취재다. 순서가 뒤바뀌거나 여정 중에 돌발변수가 생기면 낭패일수도 있다. 그러나 여행 중에는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없다.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면서 오감(五感)이 느끼고 망각하기를 반복할 뿐이다. 좋아하는 장소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도 바쁜데 내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다 기억한단 말인가. 여행을 다 마치고 나서 기억나는 부분을 짜맞출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취재를 하면 기사가 작성되고, 여행을 하면 가장 강렬했던 순간의 기억을 토대로 기행문이 나오게 된다. 취재여행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두 가지를 다 했다면 취재도 아니고 여행도 아닌 것이 된다. 오늘의 주제도시 제천은 왠지 기사의 분위기가 풍기는 기행문이 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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