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code, 부호)란 기호를 해석하기 위한 규약이나 그 체계를 말한다. 예컨대 로마자는 그것을 사용하는 각 국에서 읽는 방식대로 읽어야 그 나라의 언어가 된다. 한글의 경우에도 물론 그것을 어떤 소리로 읽어야 할지에 대한 규약이 있는데, <훈민정음해례>는 그 코드의 생성 원리까지 밝히어 적어 놓았다. 물론 코드는 문자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코드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전언(message)에 대해서 같은 의미로 파악하도록 하는 약정이다. 그런데 코드화(coding, 부호화)된 층위에 따라서 실제 의미는 달라질 수도 있다. 예컨대 “잘 먹고 잘살아라.”라는 어휘적 수준의 코드가 아니고 관용적 층위의 부호체계를 적용해야 한다.

  언어를 해석하기 위한 코드는 언어 내적인 체계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너무 덥네.”라는 말이 어떤 때에는 상대방에게 실내의 난방온도를 낮추도록 할 수도 있고, 어떤 때에는 창문을 열게도 하며, 어떤 때에는 화가 났다는 표현으로도 들린다. 기호를 어떻게 해 석할지는 전달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로만 야콥슨(Roman Jacobson)은 화자가 대화 상황을 전개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로부터 패틱 기능(phatic function)을 제시한다. 우리말로 ‘상황적 기능’이나 ‘친교적 기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흔히 의례적인 인사말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 말을 통해 사물이나 사상을 알게 하는 것을 지시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비해서 패틱 언어(phatic language)에는 지시적 내용 밖의 것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아무리 ‘용건’이 있는 대화를 위해 만났더라도 보통은 상대방에게 “안녕?”, “잘 지냈어?”나 “날씨 좋네.”와 같은 패틱 언어로 대화의 문을 연다. 문자 그대로는 상대방이 무사한지를 묻거나 날씨의 상태를 평가하는 말이지만 상대방도 그에 대한 문자적 답변보다는 의례적인 대답을 한다. 되돌아오는 말이 만일 “봄꽃들이 한창 이네.”라면 이어질 용건이 긍정적인 내용임을, 혹은 “요즘 왜 이러나 몰라.”라면 좀 심각한 내용으로 전개될 담화의 예비적 발화로 생각할 수 있다.

  목적과 의도를 포함하여 말하는 행위를 통틀어서 화행(speech act)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거나 그 개념에 의한 진리치가 무엇인 지가 언어에 대한 주된 관심사였다. 이에 대해 오스틴(J. L. Austin)이 화행에 관심을 둘 것을 제안한 것은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예를 들어, 교과 지도교수에게 “앞으로 열심히 공부할게요.”라고 했을 때, 분석철학자나 언어학자들은 ‘그가 열심히 공부하다’라는 명제와 그것이 참, 거짓을 따지기 어려운 미래라는 시제로 분석할 것이다. 그러나 오스틴이 보기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발화자가 ‘약속 하는 행위’를 했다는 것뿐이다. 이 약속으로부터 얻는 효과는 지도교수의 걱정을 덜어주거나, 계속될 수도 있는 지도교수의 잔소리로부터 이 학생이 벗어나는 일이다. 오스틴에게 있어서 발화란 말 자체보다 말한 사람의 의도와 말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가 더 중시되는 일이다.

  비지시적 언어로 구현되는 화행이라도 인간관계나 사회적 상황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번은 필자의 부부가 외국의 한 도시에서 다소 붐비는 식당에 들른 적이 있다. 식탁에 앉아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 데 마침 비좁은 통로를 지나가던 관광객 아주머니가 우리의 식탁을 치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Oh, my stupid ass(아이구, 내 멍청한 엉덩이 같으니라구)!”라며 웃었다. 자책을 담은 우스갯말로 사과를 대신한 것인데, 자칫 짜증이 날 수도 있는 순간에 아주머니의 말과 웃음은 다시 여행지의 흥겨움을 이어주었다.

  한국 사회는 이런 종류의 언어를 구사하거나 수용하는 일에 대해 인색하다. 매사에 진지하다. 만일 치과의 대기실에 앉아서 진료순서를 긴장하며 기다리다가 옆 사람에게 ‘실없는 말’이라도 건넨다면 그가 아래위로 훑어볼지도 모른다. 별달리 할 말이 없더라도 안면이 깊지 않은 상대에게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실없는 말을 건네는 경우가 있는데, 만일 상대방이 이를 무시한다면 말을 건 사람은 겸연쩍거나 불쾌할 수도 있다. 이런 언어를 주고받는 시간의 길이는 당사자들의 접촉 빈도나 친밀도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지만, 이런 대화를 전혀 구사하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존중의 표현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오만함이나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침묵으로 이후에 전개될 대화에서 심리적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의도로 보일 수도 있다. 이렇게 인색한 이유로, 한국 사회는 배려보다는 경쟁이 더 강요되는 사회라는 생각도 든다. 고등학교 때부터 독서나 봉사 등, 하나하나의 활동이 모두 생존을 위한 점수로 환산된다. 한국인은 매 순간이 너무 진지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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